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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가 은언군의 후손에서 철종을 발굴했다면, 조대비는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
恩信君
을 금맥으로 삼았다. 은신군의 손자인 이하응
李昰應(1820~1898)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흔이 넘었으니 왕실의 대를 잇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다.
그에게는 명복
名福
이라는 열한 살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기 때문
명복 소년이 조선의26대 왕인 고종
高宗(1852~1919, 재위1863~1907)으로 즉위하게 되었다(정조 이후 조선의 여섯 왕은 모두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이었기에 나중에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했다).
이하응은 10대 시절에 부모를 모두 여읜 뒤 안동 김씨의 탄압으로 숱한 고초를 겪었으므로 안동 김씨에 대한 원한이 결코 조대비에 뒤지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뜻을 이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고종의 치세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가세가 몰락한 풍양 조씨는 대비의 소망과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아무리 무도한 세도가문이라 해도 세도를 휘두를 만한 ‘인재’가 필요한 법인데, 당시 풍양 조씨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그래서 권력은 자연히 그녀의 파트너인 이하응에게로 옮겨왔다.
천주의 방향을 달리 설정했을 뿐 개념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동학이 탄생하는 데는 100년 전부터 조선에 보급된 서학의 영향이 있었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서학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가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생겨났다
서학처럼 동학에서도 천주를 주장한다.천주가 하늘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는 점에서 뜻은 정반대지만 어쨌든 동학도 일종의 천주교라고 볼 수 있다.
최제우가 갑자기 처형되는 바람에 동학교도들은 그가 평소에 쓴 글을 모아 《동경대전(東經大全)》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그가 지은 노래를 모아 《용담유사(龍潭遺詞)》라는 노래집을 펴냈다(용담은 최제우가 수련한 경주의 연못이다). 노래집까지 펴낸 것은 좀 특이한데, 최제우와 동학교도들은 서학(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성가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도 동학이 그리스도교를 모방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865년 봄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건 사업은 대원군의 구상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좀 뜬금없었지만, 별다른 권력 기반이 없던 대원군으로서는 오랫동안 실추되어왔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처지였다.
대원군은 며느리의 조건으로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며느리는 놀랍게도 명망대가와는 전혀 무관한 여흥 민씨 집안의 열다섯 살짜리 계집아이였다. 민씨라면 바로 대원군의 처가가 아닌가?
결과적으로 보면 세도가를 뿌리 뽑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선택한 대원군의 판단은 잘못이었다. 쇠붙이라면 모조리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권력의 속성상,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다는 소식은 민씨 일가붙이들을 총집결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실험도 서학 때문에 실패했다고 여긴 그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수락한다면 조선이 존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영국군이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베이징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실은 소식이라기보다 소문에 불과했고, 그것도 사실이 아닌 오보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는 뜬소문만으로도 정책이 뒤바뀔 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대원군이 사교의 신부를 만난다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거세게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대원군은 노선을 급선회해 서양 세력과의 타협 없는 투쟁을 선언했다. 그 결과가 바로1866년2월의 병인박해
丙寅迫害
다.
이곳에서 ‘절두’된 교도의 수는 남종삼을 비롯해1만 명에 가까웠으니 가히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의 목숨보다 대외적으로 더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은 베르뇌를 위시해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함께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제너럴셔먼호가 화염에 휩싸인 지 한 달 뒤에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
그리고 두 달 뒤인10월 초 프랑스의 군함 일곱 척과 병력1000명이 본격적인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병인양요
丙寅洋擾
인데, 침략자들은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죽인 대가로 조선인9000명을 죽이겠다."라고 선언했으니, 대원군의 병인박해에 못지않은 광기이며 야만이 아닐 수 없다.
정족산성을 공략한 전술은 과연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의도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오히려 조선군은 산성을 점령하지도, 방어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선이 정족산성의 탈환에 그토록 집착을 보인 이유는 바로 그곳에 역대 왕조실록들을 보관한 사고(史庫)가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마니산에 있다가 병자호란 때 청의 공격으로 불타 무너지자 정족산으로 옮겼다). 중화 세계에서 역사서라면 국가 최고의 보물이자 비밀인데 그것을 오랑캐에게 빼앗겼으니 조선 정부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에 국가 보물을 보관한 이유도 역사적으로 외침을 당할 때마다 정부가 강화도로 도망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871년 봄,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의 군함 다섯 척과1200명의 병력이 또다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5년 전 상황과 다른 점은 처음부터 응징과 보복을 부르짖었던 프랑스와 달리 미국은 이미 침몰한 배는 어쩔 수 없으니 그 대신 통상을 하자고 나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트집을 잡아서 힘으로 굴복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에서 통상 협상을 벌이는 게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 공식이 아닌가?
과연 로저스는 협상 대표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함대를 강화도로 진격시켰다.5년 전 프랑스 침략의 악몽을 떠올린 조선군은 먼저 대포를 쏘았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는 결과를 따지기가 애매하다. 우선 전쟁 자체로 보면 화력에서 앞선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강화도에 성조기도 꽂았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얼마 안 가서 철군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제국주의 열강이 그렇듯이 미국은 조선 본토는커녕 강화도조차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조선의 개항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의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와 정반대로 강화도는커녕 조선 본토까지 적에게 정복된다 해도 개항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랬으니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도 두 손 들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 정부의 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서양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통상이든 뭐든 그들과 일체의 대화나 교섭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원군 정권의 트레이드마크인 쇄국정책
鎖國政策
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위정척사
衛正斥邪
,즉 정의를 수호하고 불의를 배척한다
대원군은 병인양요가 끝나고부터 쇄국의 결심을 굳혔다.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일제히 존화양이
尊華洋夷(중화를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정신)를 목청껏 외쳤다.
중국이1839년 인도산 아편2만 상자를 압수해 불태워버린 사건은 오히려 영국이 본격적인 침략 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를 빌미로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으로 개항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고 중국의 다섯 항구를 개항했는데, 이때부터 홍콩은 영국령이 되어 150년 뒤인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된다. 그 밖에 영국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고 아편 문제는 제기하지도 못하게 했으니 그런 적반하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갖기로 한 점이었다.
조선에서 최제우가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던 무렵에 중국에서는 홍수전
洪秀全(1814~1864)이라는 자가 등장해 그리스도교와 중국의 전통 사상을 적당히 버무려 상제교
上帝敎(‘상제’는 옥황상제를 뜻한다)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반

만주족 지배와 반외세를 구호로 내걸었다. 이것이 중국판 동학운동이라고 할 태평천국운동이다
이때부터19세기 말까지 약30년 동안 중국에서는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
洋務運動
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조선은 대원군 집권기의 10년 동안만 쇄국기였지만 일본은 에도 바쿠후가 성립된 17세기 초 이후 개항될 때까지 무려 250년간이나 공식적인 쇄국을 유지했다.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쇄국을 가져온 것도 서양의 그리스도교였다. 처음에 에도 바쿠후의 창건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측근들까지도 서양의 종교를 믿는 것에 놀라 탄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통로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않았다. 특히 네덜란드에는 계속 무역 특혜를 주었는데, 조선에 처음 온 서양인(벨테브레이와 하멜)이 모두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20여 년 전인1854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은 군함 네 척만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간단히 일본을 개항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조선이 전혀 개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니 미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도 당연했다.
일본은 천황이라는 상징적 중심이 있었으므로 설령 쿠데타 세력이 바쿠후 정권을 거부한다고 해도 천황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치적 메커니즘이 있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시시
志士
라고 불리는 젊은 개혁 세력이 등장해서 미국의 군함 몇 척에 무력하게 굴복한 바쿠후 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존왕양이
尊王洋夷(여기서 ‘왕’이란 천황을 가리키는데, 천황의 존재가 현실 정치에 잘 이용된 셈이다)를 구호로 내건 반바쿠후 세력은1868년에 드디어 바쿠후 정권을 무너뜨리고 무려1000년 만에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당시 천황이 바로 열여섯 살의 메이지 천황이다.
후대에 메이지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이름을 딴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때문이다.1868년부터 시작된 이 개혁 운동은 물론 소년 천황이 직접 주도한 게 아니라 메이지 정부의 젊은 관료들이 입안하고 집행한 것이지만, 일본이 오랜 바쿠후 체제(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조선의 사대부 체제와 같은 위상이다)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로 복귀했기에 가능한 개혁이었다.
유신이라는 말은 원래 《논어》에 나오니까 족보에 있는 용어지만, 박정희는 바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자신의 유신을 따왔다.
조선이 신미양요의 혼란에 빠져 있던1871년에 일본은 중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나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외교 관계라는 점에서, 작지만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과 같은 위상이 되었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구상은5년 뒤에 현실로 드러난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대원군이다. 신미양요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골수 성리학자들의 고리타분한 입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도 전후 복구와 경복궁 재건축 등으로 돈 들 데가 많은 마당에 여전히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는 서원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는 반대 세력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원 철폐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성균관 유림 세력의 반발까지 부를 만큼 과격한 조치였으니 분란이 빚어지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원군은 만동묘(위쪽)를 철폐하고 당백전(아래쪽)을 발행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유림의 반발과 인플레였다.
1875년 가을 메이지 유신의 자랑스러운 산물인 일본의 근대식 증기군함 운요호
雲揚號
가 강화도 해상으로 왔다.
10여 년 전의 프랑스와 미국은 침략의 구실이라도 있었으나 일본은 그것조차 없었다. 그러나 만들면 되는 게 구실이 아닌가?
식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함선에서 보트를 내려 선원 수십 명을 강화도에 상륙시킨 게 그 미끼다. 명백한 무단 침범이므로 조선의 수비대가 사격을 가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덫에 걸려들었다.
각본대로 운요호는 함포 사격으로 응수하는 한편, 수십 명의 전투 병력까지 풀어 정식 교전을 유도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36명이 전사한 데 비해, 일본 측은 경상자가 두 명뿐이었다. 그것만도 조선 측의 큰 손실이었지만, 정작 조선이 입게 될 손실과 일본이 노린 이득은 그 뒤에 가시화된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이렇게 전쟁을 먼저 벌인 뒤 외교를 통해 유리한 협상 고지를 차지하는 솜씨는 과연 일본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라는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련하고 교활했다.
고구려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된 것도 이 측량 작업에서다. 조약에서는 한반도의 연해와 섬 들만 측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군인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조선 전역의 지리와 문물을 조사하게 했다.
일본의 의도를 더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조약의 제7조다. 이것은 조선의 연해와 섬 들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이 조항 하나뿐이다. 동등한 관계라면서 남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측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곧바로 한반도에 대한 면밀한 측량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강점한 뒤 이 측량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이어져 한반도를 장차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당한 처지였지만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불과20년의 시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항했으나 그 뒤 메이지 유신을 이루면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개항되면서 신흥 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19세기 중반에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게 아니다. 그 배경에는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에도 바쿠후 시대의 오랜 번영기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비록 대외적으로 쇄국을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도 숱한 진통과 혼란을 겪었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비중화 세계 특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착실히 국력을 키웠다.
대원군이 허무하게 물러나자 그 빈자리를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이 꿰찼다. 그전까지 조금씩 조정으로 들어오던 민씨 세력은 개화를 계기로 아예 중앙 권력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정통 관료 출신인 김홍집
金弘集(1842~1896)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민씨 세력은 오로지 대원군을 반대하기 위해 개화를 주장한 것이지만, 김홍집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한 소신 있는 개화파였기 때문이다.
당시 청은30년에 걸친 양무운동으로 서양 문물을 수용한 상황이었으므로 가장 우려하는 적은 북방의 러시아였다. 그래서 《조선책략》도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는 것을 가장 주요한 과제로 삼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친중
親中
ㆍ결일
結日
ㆍ연미
聯美
,즉중국ㆍ일본ㆍ미국과 동맹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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