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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토라와 보르의 방
  • 요리의 길을 묻다, 로산진
  • 박영봉
  • 16,200원 (10%900)
  • 2010-04-15
  • : 145

가정요리에는 인생의 진실과 진심이 있고,

요리점의 요리에는 형식과 꾸밈이 있다.

그래도 우리가 요리점의 요리에 감동하는 것은

명배우인 요리사의 열연(熱演)이 있기 때문이다."

 

<맛의 달인>을 보았다면 로산진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는 로산진을 모델로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로 우미하라의 성격이나 행동을 보면 로산진의 삶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본문 중에 현대 일본 요리는 모두 로산진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 인용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일본 요리에 대한 만화나 책을 여러 권 보았는데 실제로 거기에서 로산진의 영향은 엄청나다. 그가 가진 요리와 미식에 대한 철학과 요리를 대하는 예술가적 엄격함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현대 일본 요리를 지탱하는 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마침내 대가들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대가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실로 유치한 것이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교적으로만 관찰하고 외형만을 중시하고 있다. 서도가의 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보니 옛날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근대에는 글다운 글이 없다. 그들은 왜 정해진 틀만 고집할까? 한마디로 말해 그들에게는 예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로산진이 정규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런 대가들의 밑에서 사사받는 엄격한 풍토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요리와 도예를 아우르는 틀이 없는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가 자라난 것이 정해진 영역 안에서만 머물기를 강요받는 환경이었다면 일본은 지금 로산진의 유산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로산진 후에 미국과 프랑스를 여행하며 그들의 요리가 형편없다고 평했다고 한다. 사실 서양 요리의 귀족이라 할만큼 자존심 강한 것이 프랑스 요리고 또 거기에 껌벅 죽는 이들이 지금 우리 나라에도 많지만, 로산진이 살던 시대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거리낌없이 그런 이들을 비웃는다. 요리에 대한 철학이 깊고 확고하기에 그런 대담한 발언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로산진의 혹평은 "일본 요리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법이다"라는 삭의 유치한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바탕에는 결국 각 국가의 문화가 "요리"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가 깔려있다. 요리와 매끼의 식사가 수양의 일부라고 생각한 그에게 특히 "편리"를 추구하는 많은 미국 요리가 "경멸할 만한 수준" 표현까지 서슴지 않을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리를 가르친다고 소금 몇 그램, 설탕 몇 술, 간장 몇 술 등 정확하게 소개하며, 파를 적당하게 자르고 소금과 후추는 또 어라나 쳐애 하는지를 말해야 하는가. 무엇 무엇을 몇 그램씩 사용하라는 요리법을 따르는 것을 과학적 문화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과학적 문화인이란 과학하는 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하는 사람이지 소금 몇 그램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생각한 것이 있다. 요즘 "한식의 세계화"라는 말을 참 많이 한다. 그러나 사실 지금 한식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음식을 예쁘게 담는다거나 재료를 계량화한다거나 하는 세세한 기술이나 국가가 팜플렛을 뿌리는 정책적 홍보가 아니라, 로산진과 같이 한식의 철학을 새로이 세움과 동시에 수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재능을 가진 거장의 출현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을 넘어 끝까지 남는 것은 산업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진리는 요리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세계화를 하는 방법에는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인해전술도 있지만, 작은 나라인 우리 나라에는 무리가 아닌가 싶다)

 

(정치사회문화적 문제를 인지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독자적인 면이 부족한 것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의 도자기는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 제작 기교나 느낌은 일본의 성격과 공통되는 점이 있으며 중국의 것보다 한층 친근감이 있다. 편호 하나만 보더라도 취향이 잡스럽지 않으며, 흠이 있는 듯하면서도 완전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 점이 예술적이다. 중국에도 여러 가지 편호가 있지만 너무 기교적이며 잘 꾸며진 느낌이다. 그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보아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며, 감상용으로 보더라도 예술적 생명이 부족하다."

 

서예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도예가로서의 로산진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로산진의 그릇들은 분명히  禪불교와 일본적인 색채의 냄새가 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조선 도공들의 여유로움을 쫓아가려는 느낌도 준다. 로산진도 인정한 바이지만, 고려와 조선 자기는 사실 정말 대단하다. 개인적으로도 도자기는 당연히 한국의 자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왜냐하면 일본의 박물관에 여러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어도 고려 혹은 조선 자기는 발군이라 할만큼 눈에 띄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소위 예술가적 자기 주장이나 화려한 작위적 기교 없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여유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당연히 그것을 몰랐을리 없는 로산진이 당시 조선을 여행하기도 했었다고 하지 않은가.

 

한국인으로서 우리땅의 수준높은 옛 자기가 눈에 익은 나로서는 일본 그릇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로산진의 그릇들이 현대적인 매력이 겸비된 훌륭한 작품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로산진의 대단함은 요리에 있어서 그릇의 가치를 분명하게 끌어올린 점에 있다. 나도 사실 자기와 관련해서는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구경하는 것외의 경험은 없어서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거나 만진다는 감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로산진에게 있어서 술병이든 그릇이든 다완이든 그것은 사용할 때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되는 식기-였다.

 

그릇에 대한 이러한 철학은 어떤 면에서는 실용주의적이지만 사실 선불교적 가치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기에 서양적인 실용주의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 하여 버려두지 말라. 개수대가 깨끗하면 흘러가는 쓰레기도 깨끗하게 보이는 것이다. 쓰레기통도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요리사는 주변을 청결히 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인격을 기르고 마음으로부터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일본에 대해서 관심과 감정을 갖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은 일본을 잘 모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 대상의 내부를 볼 만큼 성숙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이해의 시도 자체가 방해받고 있는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잘 알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 불상의 아름다움은 사실적 묘사에 있지 않다. 일본 불상은 미의 집합체이며 극한의 미다. 프랑스에 그림을 배우러 가는 사람은 이것을 잊고 있다. 분명히 프랑스에는 일본에 없는 색깔이 있겠지만, 일본의 미를 모르고 남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경제적 상업적 현실 이상으로 일본이 어떤 나라든 진정으로 그 본질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도 하나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로산진'은 일본 문화가 가진 힘의 한 단면이니까. 물론 그 유산을 지금의 일본인들이 자기 현실 속에서 잘 발전시켜가고 있는가-는 또 생각해 볼 문제겠지만 말이다.

 

"다실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절제되고 격식을 갖춘 예절과 행동이 다실 밖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당사자 앞에서는 달콤하고 온화한 어조를 띠다가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어떤 험담을 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속으로는 항상 상대방의 허점을 유심히 살피고 있으며, 솔직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차인이 많다."

 

이 책은 굉장히 잘 짜여지거나 문장이 화려한 책은 아니지만 특별히 꾸미지 않는 소박한 맛이 있어서 읽는 데에 부담이 없다. 로산진의 요리나 도예 작품의 사진들도 적절하고 정갈하게 잘 실려 있어서 보기 좋다. 작품 사진 만으로도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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