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내가 한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 작은 뇌가 달린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쓴다, 라는 말은 이런 때를 위해 예비된 말이었다. 문장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타자 연습 게임 같았다. -김영하, 옥수수와 나 중-46쪽
타인의 결점만을 확대하여 지켜보는 사람은 방심한 자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을 공격하게 마련인 깨진 유리와 다를 것 없는 존재이고, 그려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로 각인되는 게 염려될 뿐이다.-조해진, 유리 중-269쪽
이 순간의 선택으로 앞으로 꽤 긴 시간을 끊임없는 후회 속에서 소모하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어제 같은 오늘보다는 후회라도 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더 인간적일지 모른다는 단순한 변명에 그녀는 한 번만 더 기대 보고 싶었다. -조해진, 유리 중-280쪽
세상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데 도망가는 사람도,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그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붕괴였다. -조해진, 유리 중-284쪽
포스트잇처럼 깔끔한 이별이었다. 이 년이라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청테이프의 그악스런 흔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카치테이프의 투명한 끈적임 정도는 남아도 좋으련만. -최제훈, 마루의 초상화 중-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