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갈 생각을 하니
빽빽히 꽂힌 책들이 무서워졌다.
짐을 줄이자 마음먹고
오래된 책들과 안 볼 것 같은 책들, 금방 볼 수 있는 책들부터 솎아내
중고책방에 열심히 등록하고 있는 날들.
일단 올려두고,
주문이 들어온 책부터 읽어나간다.
대부분 한 권씩 주문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이렇게 다들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구나 감탄하곤 한다.
나는 왜 그토록 무료배송이나 사은품이나 적립금의 노예로
살았던건가요.
지름신과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반성하곤 하지만
여전히 내겐 너무 먼 당신, 배송비,
배송비 낼 바에 책을 한 권 더 사겠어요,
그러다 이 꼴이 났지만요, 흑흑
어쩌다 한번에 여러권 주문이 들어오면 비상사태.
여러 권을 얼른 다 읽어야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리기 시작하면
계속 딴 짓을 하다가 피곤해져서
결국 그냥 팔아버리는 일도 다반사.
그렇다면 나는 왜 그 책을 사놓았던 것인가,
택배기사 손에 실려가는 책에게
우리 이어지지 못한 인연을 슬퍼하며 뒤돌아설때
인생은 참으로 쓸쓸한 것이라지.
하지만 뒤돌아선 그 앞에는 다시 수북한 책이, 룰루랄라.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로
배송되는 책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다.
전국으로 한권씩 한권씩 퍼져가는 책들을 상상하고 있으면
전염병이 퍼져가는 지도가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 영토가 이렇게 넓어지고 있는데,
이거 참, 가볼 시간이 없구먼.
빨리 솎아내는 책들로는 역시 만화책이 으뜸.
그 덕에 요즘은 계속 틈만 나면 만화책들을 보고 있다.
죽죽 보고 팔기에는 아까운 책들도 많아서
짧게라도 써놔야지 마음을 먹긴 했는데,
아직도 한 줄도 못 쓰고 있다니,
이건 또 며칠이나 갈려나..
사실 갑자기 쓰고 싶어진 큰 이유는
이 책 때문인데,
꼬마비가 꼭 내야한다고 해서 나온 책으로
꼬마비 팬이니 사긴 했다만
아내가 참 엉뚱한데
보고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이렇게 사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겠다 싶기도 하고,
이런 엉뚱함을 다 받아주는 남편을 보며
아아, 역시 누구나 제 짝은 있기 마련이란 생각을 하며
위안을 얻기도 하고,
아니아니, 그러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책 내용보다
책 뒤편 옮긴이 정은서 소개가 어쩐지 끌렸기 때문인데,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책과 커피, 컴퓨터만 있으면 사시사철 행복한 번역가,
덕분에 혈관 속에는 피 대신 커피가 흐르고 있다'
어쩐지 부러워졌다, 이 번역가.
이런 것에 흔들리고 있는,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