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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서

<시를 쓰는 소년>의 표지 이미지를 고를 때 계속 생각한 미시마의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거다 하고 제 마음속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이미지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미시마의 이 말은 같은 유미주의 문학이라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예술 전체에도 해당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야스나리의 문장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제가 미시마의 문장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미시마 씨의 문장은 무척 가냘프지 않았냐는 어느 여학생의 질문에 미시마가 대답한 것 중의 한 부분이에요.
제가 가냘팠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만, 나는 문학에서는 지금도 가냘픈 파입니다. 이것은 제발 오해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문학은 지금 질문하신 여성보다 훨씬 더 가냘프고, 아무리 우아한 여성보다도 훨씬 더 우아하고 가냘픈 것이라고, 아무튼 손바닥에 살짝 놓아두어도 금방 부서지고 말 것처럼 우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그러나 내가 문무 양도(文武兩道)라고 말씀드린 의미는, 그런 우아한 문학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무사도가 있다는 것이 일본 문화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지금의 우아한 문학에서 봤을 때, 제가 가냘픈 문학을 하고 있지 않다면 점점 중간 소설의 조악하고 까칠까칠한 문학이 되고 말 뿐입니다. ...


미시마가 문무양도의 문장을 찾아온 길은 지금 작업하는 에세이에서도 종종 나오는데, 미시마의 에세이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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