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두치(咽頭齒) 8
'이것 좀 봐봐. 어제 보니까, 왼쪽 손목에 이게 생긴 거야. 수포처럼 오돌토돌한데, 좀 가렵기도 하고. 두 군데 생겼어. 그것도 왼쪽만.'
'올려주신 사진을 검토해 본 결과, 화폐상 습진으로 보입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하거나, 어떤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닿아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 이게 청소일 하면서 락스를 좀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원인을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도 피부 질환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경주는 Gemini가 언급한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손톱에 콱, 하고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도무지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 남편을 보며 안쓰러웠던 감정이 조금씩 증오와 분노, 경멸이 뒤섞여 단단한 공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경주는 습진이 생긴 왼쪽 손등을 벅벅 긁다가, 자신도 모르게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남편이 커다란 애벌레 같았다. 그 애벌레는 소파에서 집을 짓고서 먹고 잤다. 남편이 늘 보는 뉴스 채널의 소리도 아주 듣기 싫었다. 지루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었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협상 소식을 경주는 날마다 들어야 했다.
중기는 경주가 구만에게 언제쯤 화를 낼지 가늠해 보았다. 경주의 왼쪽 손등은 군데군데 터져있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해도 물이 손에 닿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중기는 자신이라면 경주처럼 저렇게 몸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원체 약골인 중기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며칠만 해도 그냥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중기는 어젯밤 늦게 통조림 택배를 받았다. 배송 예정 시간은 오후 5시였지만, 중기가 문 앞에서 툭, 하며 상자가 던져지는 소리를 들은 것은 자정이 되기 5분 전이었다. 새로 바뀐 택배기사는 여자였는데, 아마도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렇게 배송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신소미. 배송 기사의 이름이 찍힌 운송장을 뜯어내며, 중기는 먹고 산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저 여자 택배기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것이다.
33%. 휴대폰의 배터리 잔량을 보고, 중기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중기가 휴대폰을 충전하고 있을 때, 경주도 잔량이 25퍼센트인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낮에 일하는 동안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이어폰으로 듣는 오디오북이 배터리를 빨리 닳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경주가 듣는 오디오북은 늘 추리 소설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은 범인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경주는 아파트 청소를 하는 동안에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계속 생각해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라기 보다는 경주에게는 나름대로 노동의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했다. 경주는 매일 화단으로 서너 개씩 담배꽁초를 내던지는 입주민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오디오북 속의 살인범은 현실의 담배꽁초 투기범으로 변모했다.
중기는 경주가 출퇴근 시간에 오디오북으로 추리소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중기는 경주를 '아파트 청소일을 하게 되었다'까지만 설정해 놓았을 뿐, 경주의 하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중기에게 이 소설은 방전된 상태에서 꾸역꾸역 써내는 일기 같았다. 구만은 애벌레처럼 소파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있었고, 경주는 무기력하게 그런 남편을 바라보았다. 물론 중기는 작가로서 자신이 과연 그들의 삶에 무슨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계속 고민은 하고 있었다.
"그런 게 있잖아요. 소설을 쓰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막 살아서 움직인다니까요. 어느 순간에는 자기들이 혼자 말을 시작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해요. 그럼 또 나는 그걸 정신없이 받아서 써내고 있단 말이죠."
그 말은 중기가 주말에 듣는 문화센터 소설 창작 강의 시간에 늙은 수강생 아줌마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몇몇 수강생들이 짐짓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기는 자신이 쓴 소설에서 인물들이 그런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별로 기억나질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가만히 있을 때가 많아서, 중기는 그들을 끌고 이리저리 다녔다. 그런 때가 있기는 했다. 인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빼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썼다.
"그렇지요. 모름지기 좋은 작가란, 그런 인물의 목소리를 잘 듣고 써내는 사람입니다."
소설가 선생은 그 수강생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난 좋은 작가는 아닌 모양이군. 중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중년의 소설가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때는 촉망받는 소설가였던 선생은 이제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과거에 그가 써냈던 소설은 이제 문화센터와 백화점, 도서관들을 돌면서 강의할 수 있는 생계의 밑천일 뿐이었다. 중기가 생각하기에 선생이 소설을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선생은 수강생들이 써온 소설들에 웬만해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중기의 단편을 읽고 선생이 하는 소리는 매번 똑같았다.
"디테일이 부족해요, 디테일이."
물론 수강생 중에서 디테일이 부족한 사람은 중기 혼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등장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고 말했던 늙은 아줌마의 소설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였을 뿐이다. 1970년대 코딱지만 한 잠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송파구의 주민으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여자의 짧은 일대기. 그 소설의 제목은 '나는 송파가 좋아요'였다. 중기는 그 소설, 아니 자전적 이야기에 담긴 지독한 속물근성을 내심 비웃었다. 그럼에도 송파구의 38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수강생 아줌마와 강서구의 원룸 빌라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계층적 간극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