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배우는 것은 차이를 아는 것이다.

p18  

 그것은 아무도 없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느낌,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느낌,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의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따.

 그러나 홀로코스트 역시 느껴졌따.

 키퍼의 그림들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는 있지만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진중함, 즉 때로는 엄숙하고 때로는 끔찍한 진중함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듯했다.

 이들을 그린 키퍼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결코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단지 하나의 상징으로 그림들이 나온 장소일 뿐이었고, 개성이 부여된 어느 누군가-이를테면 여름날 오후에 반바지 차림으로 잔디를 깎으며 어슬렁거린다거나, 유럽 어딘가의 놀이공원으로 나섰다가 소란스러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소시지와 으깬 감자를 먹으며 콜라를 마시는 인물-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p30

 '집'이란 친밀한 공간으로, 자기 몸에 맞게 설계되어야 한다. 키퍼가 이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에서, 그는 그런 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는 그런 친밀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36

...모든 예술 작품은 내면으로부터 외부로의 움직임 속에서 탄생하며, 그 움직임은 축적된다. 내면에서의 시작은 극히 미약하며 하나의 작은 아이디어나 상상 또는 그저 충동에 불과하지만, 외부의 물질성을 만나 형태와 색을 갖추면서 크기나 무게가 점점 더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 안에서 예술을 찾는 것은 소용이 없고, 오직 예술 안에서 예술가를 찾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키퍼는 자신의 예술 속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작품 속에서 한 세대, 한 시대, 한 시절을 대표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개인으로서의 '그'는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예술은 바로 '자아'를 초월하는 것에 있었고, 역사와 철학, 신화가 구성하는 집단적인 형상을 끊임없이 추구해 왓다. 그의 작품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가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느껴졌떤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림 앞에서 나 자신의 자아와 신화의 '전체' 사이의 압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었다. 신화가 자아의 해방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키퍼의 예술은 '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다.

p55

 모든 예술은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을 다룬다. 파란색의 붓질 한 번이 강이 되고, 흰 종이 위에 여섯 획을 그어 하늘이 되고, 어느 배우가 오필리아가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한다는 것이 바로 예술의 기반이다. 눈 결정과 얼음과 곰팡이는 그 자체를 나타낼 뿐, 다른 어떤 것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술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며 그저 자연이다. 그리고 키퍼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서 이 구분, 즉 그 자체인 것과 다른 어떤 것의 재현인 것 사이의 경계,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좁혀나갔다. 재료의 재현은 재료 그 자체로 점점 더 깊이 밀려났고, 어떤 경우에는 재현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는 더 이상 재를 그리거나 짚을 그리거나 나무를 그리는 대신, 재, 짚, 나무를 그림에 직접 적용했다.

 그러면 무엇이 일어날까?

 그렇게 되면 세상 그 자체가 언어가 되는 것과 같다. 그때는 우리가 세상 그대로를 일게 된다. 재를 읽고, 짚을 읽고, 나무를 읽는 것이다. 재, 짚, 나무 자체는 물리적인 실체로서 중립적이지만, 그 자체만의 물리적 실재에 갇혀 있지 않고 오히려 의미로 가득 차서 충만해진다....

 이 모든 것은 재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존재한다. 우리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규정된 세계에서 산다고, 즉 문화는 변화무쌍하고 자연은 불변하는, 혹은 현재는 변화무쌍하고 역사는 불변하는 세계에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그리고 키퍼는 그 환상을 뒤흔든다. 키퍼의 작품은 주로 일상적인 재료로 구성되며, 그는 작은 손길을 더해 의미를 부여한다....

p57

 신의 이름?

 '나는 나이다.'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인 것, 그것은 의미의 극단이다. 스스로만을 의미하며 다른 어떤 의미도 없는 것, 세상 또한 이와 마찬가지여서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침묵하며 눈을 감는 면은 언제나 있다. 키퍼의 작품 속에서 침묵하고 외면하며 의미가 텅 빈 남은 키퍼에 의해 만들어지니 패턴 위로 흘러넘쳤고, 그 안에서 세상이 재현되었으며, 그리고 그때 발생한 것은 이해할 수 잇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사이의, 읽을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없는 것 사이의, 의미 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 사이의, 그리고 우리와 신 사이의 대화였다.

p84

 그렇다고 키퍼가 진정성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왜냐하면 그런 연출과 역할, 반복과 루틴은 외부에 속하고, 그 목적은 바로 내면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은 더 강해질 시간과 고요함을 얻기 전에는 극히 취약하며, 다름 아닌 그 내면에서 아주 작고 섬세한 무언가로 자라난다. 그렇기 때문에 내 관심은 키퍼의 역할이나 예술계 그 자체가 아니라, 한때 그가 예술계로 가져왔던 무언가, 오직 그것에 있었다. 나는 그가 이따금씩 자신의 작품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충분히 순수한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러나 결코 승부를 겨냥한 게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그렇게 된다면 예술은 죽어버린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다른 모든 것은 게임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술가를 인터뷰한다는 것은 예술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며, 예술과는 아무 관련없이 그 자체로만 흥미로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예술로부터 전적으로 단절되기 때문이다.

p91

 그의 연설은 그가 자란 편협하고, 소시민적이며, 권위주의적인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던 한 청년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청년은 예술가는 타고나는 것이고,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이기 구태여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 학교에 지원하는 대신 법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법학만의 독특한 언어, 즉 그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듯한'언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 저는 법을 공부해서 갈망과 혼란으로 가득한 제 내면에 질서와 평온을 가져오고 싶었습니다. 하고 키퍼는 말했고, 나는 정리되지 않았지만 강렬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러나 어디에서도 배출구를 찾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내면을 가진 열여덟 살의 그를 상상했다. 법학과 명확하게 현실을 구분 짓는 엄격한 지적 체계가 그러한 마음에 매려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또한 몇 년 후에 그가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자신마의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의 학문에 대한 존경심은 어마어마해 보였다.

p104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즉, 과거 또한 현재인 것이다.

p108

 나는 키퍼가 물성이나 흙과 금속 등의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재료를 추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에게는 이미지 작업이 너무나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키퍼는 단순히 그림을 오려 붙여 넣은 책 한 권만으로도 문화 전체를 담아낼 수 있고, 놀랍도록 손쉬운 수단만으로도 우리 일상 속에서 고대 신화가 펼쳐지고 살아 숨쉬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벼움에는 '저항'이 따라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품고 잇는 것이 바람에 날려 다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예술이 그 이름값을 하려면 예술가는 현실을 한 면 이상 보여 주어야만 한다. 가벼움이란 공기이고, 하늘이며, 상상의 세계이고, 추상이다. 가벼움이란 흐름이고, 가벼움이란 강이다. 가벼움은 우리를 어디로든 데리고 갈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여기, 바로 지금이라는 특정 장소, 특정 시간, 특정한 몸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저항은 숲이고, 땅이며, 또한 죽음이다. 저항은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 우리에게서 등돌리는 것, 문화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p144

 ...나는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을 굳이 찾아가지는 않네. 기억이 현실보다 훨씬 강하니까. 어떤 장소의 기억은 그 장소 자체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하지. 우리가 성장하고, 또 기억도 우리와 함께 성장하니까.  

p158

...그것들은 여전히 과정 중에 있었고, 아직은 완성된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 미완성인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바로 키퍼의 예술이 지향하는 바였다. 현실과 그 안의 모든 것은 미완성이며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 두 차원의 만남은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예술 작품은 완성되는 순간 그 과정에서 들어올려져 나오지만, 현실은 계속된다. 작업실은 이러한 과정이 일어나는 장소였고, 그래서 키퍼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다.

p169

 세상을 향한 우리 자신의 불확실한 접근 방식, 우리가 사실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미스터리에 대한 답이 아닌, 미스터리 그 자체인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