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021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의 기후대와 문화를 품은 다른 나라 같아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경험을 준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행어에도 진실이 아주 없지 않지만, 내 생각에 타인만한 토털 엔터테인먼트도 없다. 자기만의 세계관, 음악 취향, 관심사와 말솜씨, 표정과 몸짓, 신념과 상상력, 농담의 방식......이런 요소들은 그 사람 고유의 분위기와 매력을 형성한다. 물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여행자의 예의를 품을 때, 내가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을 거다.
p023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p061
...또 하나 배운 교훈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뭔가를 영원히 피해 다닐 수 없다면 제대로 부딪쳐볼 필요도 있다는 거다. 늘 머물던 안전지대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어보면 세상에 생각해온 것만큼 큰 위험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겁쟁이일수록, 위험한 상황을 좀처럼 만들지 않는 자신의 본능적 감각을 믿어봐도 좋을지 모른다. 조금 대담해진 쫄보는 올늘도 라니스터에게서 배운다. 빚은, 지지 않는 게 아니라 잘 갚는 게 중요하다.
p077
...언뜻 걱정이나 관심 같아서 속아넘어가기가 쉽지만 이런 말들은 공감도 배려도 없는 행동이다. 그 문제가 진짜 문제라면 당사자가 가장 고민하고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이 툭 건드리듯 지적한다고 당장 해결될 가능성도 없고, 무엇보다 남의 일인데 어째서 맡겨놓은 듯이 계획이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걸까?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은 어리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종종 이런 주제넘은 참견의 대상이 된다.
다행인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 적령기의 가장자리로 비켜나면서 달갑잖은 오지랖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점이다. 그러니 몇 년 동안만 단단한 멘탈로, 혹은 달관한 무신경으로 버티다보면 다 지나간다는 게 내 경험담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렇지 않아진다....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게 내 가치를 높여주거나 기분을 낫게 해주지 않으니까.
p079
...나만이 아는 나의 길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나는 남의 입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는 사람이며, 미안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행복하다...원만한 사회생활보다 내 자존감이, 어떤 타인과의 인간관계보다 나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딘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증거는 세상에 많은 결혼한 (그리고 무례한) 사람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p094
...잘 버리게 되었다기보다 잘 사지 않는 사람 쪽으로. 우선 집에 뭔가 하나를 버리기 전에는 사들이지 않기로 동거인과 약속을 했고, 도 대출금을 갚는 재미에 빠져 쇼핑이 더이상 큰 즐거움이 아니기도 했따. 작은 화장품 하나, 옷 하나를 사던 재미 대신에 요즘 내가 즐기는 건 돈을 돈인 채로 그대로 두고 보기, 새로운 적금 쇼핑하기, 환율이 떨어졌을 때 엔이나 달러 사두기 같은 일들이다. 그리고 물욕이 생길 때면 그 아픈 말을 떠올린다. 여전히 책도, CD와 LP도, 컵과 그릇도, 손ㅌ톱깍이도 아무튼 모든 게 많은 채이지만 난 호더 할머니로 물건에 둘러싸여 혼자 늙어 죽기보다 동거인과 사이좋게 늙어가고 싶다. 미니멀리스트와 같이 살게 된 맥시멀리스트의 인간 개조 과정은 길고 지난하다.
p116
여전히 말과 행동으로 실수를 한다. 서로 습관과 규율이 다르기 때문에 부딪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훅 넘어가서 침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툼의 빈도가 조금씩 뜸해지긴 하다. 싸우는 상황에서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잘잘못을 따지는 일로 받아들이고, 내 행동에 대한 해명을 하기 바빴다는 거다. 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는지 나의 논리를 이해시키려고 해보지만 상대방에게는 변명일 뿐이다. 화가 나고 서운함 마음을 살피고 위로해주는 게 먼저가 되었어야 한다. 싸울 때조차 나의 중심은 나에게만 있었던 거다.
내가 이제야 배운 싸움의 기술은 이런 것이다. 진심을 담아 빠르게 사과하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입으로 확인해서 정확하게 말하기, 상대방의 기분을 헤어려 어떨지 언급하고 공감하기. 누군가와 같이 살아보는 경험을 거치고서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부부싸움뿐 아니라 같이 사는 친구끼리의 싸움도 꼭 칼로 물 베기 같다. 우리는 언제 싸웠나 싶게 다시 사이좋게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칼로 물을 베는 그 못짓으로 해소되는 부분이 있다.
이 싸움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본다. 나의 가장 잘 드는 무기를 찾아 쥐고 한 번에 숨통이 끊어지게 적의 급소에 꽂는 것인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흠씬 두들겨패서 밟아버리는 것인가? 함게 사는 사람,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과의 싸움은 잊어버리기 위한 싸움이다. 삽을 들고 감정의 물길을 판 다음 잘 흘려보내기 위한 싸움이다. 제자리로 잘 돌아오기 위한 싸움이다.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p120
...사람이 너무 애쓰면 안 되는 법이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않는다지만 저 깊은 곳에선 상대와 제 손으로 짐을 지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p121
...그동안 서로가 서서히 내려놓은 것은 상대를 컨트롤하려는 마음이다. 대신 둘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집의 모습과 상태, 또 각자가 확보하길 원하는 독립적인 시공간을 정확히 애기하고 그것을 함께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를 바꾸려 드는 것은 싸움을 만들 뿐이고, 애초에 그러기란 가능하지도 않다. 둘이 함께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바로 단체 생활에 필요한 팀 스피릿이다. 동거인과 함께 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부과햇던 정리에 대한 압박이 꽤나 줄었고, 집이 좀 단정치 못해도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집안 곳곳에 군락지를 이루는 물건들의 생태계도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곤 한다. 반면 동거인은 물건을 들이는 습관에 대해 재고해보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집은 어느 정도 조수간만의 평형 상태를 찾았다고 하겠다.
p148
...네 마리는 이렇게 방식으로 다르게 존재하고, 각자를 제대로 보살피고 사랑을 주려면 그 차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네 벌의 옷이 있는데 소재도 디자인도 색깔도 다 제각각이라면 취급방식에도 다르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p164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밥을 얻어먹는 사람은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감별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평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음식에 돈을 지불할 때밖에 없다. 그 경우에만 음식에 비해 가격이 적정한지 말할 자격이 생긴다.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한 고귀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과 수고를 들여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익히고 그릇에 담아서 내어준다. 그 음식은 내 몸속에 들어와 피와 살을 만들고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세상에 이것보다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고마운 마음을 갖고 먹는 음식은 맛있다. 단순한 진리다. 또하나의 단순한 진리가 있다. 얻어먹었으면 고맙다고 말하고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라. 이 또한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질 일이다.
; 참 맞는 말인데 보통의 가정에서도 이걸 알면 좋을 텐데...
p170
...혼자를 잘 챙기는 삶은 물론 바람직하고 존경스럽다. 그러나 역시 남에게 해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이 더 재미있고 의욕적인 것 같다.
p178
...역시 동거인은 단순하고 튼튼하고 밝은 사람이 최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동거인의 동거인은 나니까, 나부터 단순하고 튼튼하고 밝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빠다처럼 나를 확실하게 행복하게 하는 게 뭔지를 평소에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제주에 있는 매력적인 책방 '만춘서점'의 이영주 사장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아주 맛있는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을 때마다 '아......지금 먹고 나면 언제 이걸 또 먹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해장국이 포장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걸 집에 사와 서 냉장고에 넣어둔 날,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행복은 보장된 미래.'
미래에 맛있는 해장국이 보장된 오늘과 그렇지 않은 오늘은 분명 다를 것이다.
p185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말이 성립하는 건 당연하게도 그게 내 일이 아니라서다. 거리를 두어야 눈에 들어오는 형체가 있고, 너무 뜨거울 때는 삼키지 못하는 덩어리들이 있으니까. 남의 연애에는 서두르지 말라든가 미련을 버리라든가 잘도 충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막상 모두 사랑의 달인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컨설턴트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만두어야 할 시점을 고민할 때. 면접을 보고 와서 새로운 가능성을 그려볼 때, 울렁거리며 중요한 발표를 연습할 때, 우리집에 같이 사는 내 컨설턴트는 같이 모색하고 명쾌하게 길을 알려준다. 흥분을 잘하는 성격답게 가끔은 저멀리 혼자 달려나가기도 하지만 나도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따르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가장 든든한 건 이 컨설턴트가 그 어떤 경우에도 보여주는 나에 대한 믿음이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성실한 품성을 지녔고, 전력을 다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믿음은 아주 가끔 내 자존감이 쪼그라들 때조차도 티 없이 단단해서, 계속해나갈 힘을 준다. ....
p250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긴장, 걱정을 해소시켜주는 건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사소한 장난, 시시콜콜한 농담,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다.....누구나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쓸모없고 시시한 말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한 사람쯤은 갖고 싶은 것이다.
p304
...헤어질 줄 알면서도 만나고, 기꺼이 사랑을 하고, 그 개별적인 존재의 어떤 특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시간들을 쌓고, 때로는 고통이 되기도 하는 그런 기억이 켜켜이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 자체가 우리의 인생을 이루는 것 아닐까.
p317
..."함께 일하는 사이에서 가장 위하는 태도는 '쟤가 하는 저건 나도 하겠다"일 거예요. 저희는 다르게 생각해요."쟤가 하는 저건 나는 절대 못하잖아. 대단한 걸 하고 있네. 나 대신 해주니 고맙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간에 나로서는 도저히 못 할 부분을 상대가 맡아주고 있다는 걸 우리는 명확히 알고,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