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도 늙었나봐'
후배와 박민규 소설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들은 소리였다. 나는 갑자기 '늙었나봐'라는 말에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건 나의 진부함과 고리타분함에 대한 질책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왜 그 얘기가 나왔더라, 아, 그래. 박민규 소설을 읽고서 내가 그녀에게 '나는 왜 시끌벅적한 게 싫지? 얌전하지 않은 것도 싫고. 튀는 게 싫은가봐.' 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던 참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랬던 것이다.
'언니가 늙은 거에요. 나는 그게 좋기만 한데.'
따지고 보면 박민규 소설이 극성스럽게 유난하거나, 가독을 저해할만큼 도드라진 구성이나, 그리 난해하지도 않은데. 이야기는 재미있고, 진술력은 유쾌하며, 나름대로 명확한 결론에, 따스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애도 느껴지고, 게다 시사성도 있는데.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무규칙 이종 소설가'라는 타이틀이나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주먹보다도 더 큰 멋진 안경을 쓰고 있는 외모 때문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새삼스럽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그의 두 편의 장편에 대해 지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던 독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편의 단편은 익히 알고 있는 박민규 스타일,에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무난한 작품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좋아 박민규 소설을 흔쾌히 읽은 독자였는데도 말이다. 고작 독특한 행간 나누기 스타일 때문이라는 이유는 이제와서 너무 구차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나는 '심드렁하게', '싫다'라는 표현을 했을까. 주저없이 별 다섯 개를 줄 것이면서도 말이다.
나는 어느 고3 학생을 한 명 알고 있다. 그는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고, 장래희망은 서점 주인인데, 대학교는 문창과에 가고 싶어한다. 문창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라면 실기 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 학생이 실기 연습을 위해 연습하는 습작을 읽을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어디선가 읽었을 법한 범죄와 실종사건, 살인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며, 러시아의 음습한 숲, 일본의 어둡고 좁은 골목, 때로는 목욕탕으로 개조된 비밀 실험실 등 종횡무진 상상을 뛰어넘는 곳이 습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탐정이나 외계인, 사냥꾼도 거침없이 등장하고, 주인공인 봉제인형이 자신의 주인과 대화를 하는 화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가독성도 높은 데다가 아주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어디에도 현실은 없다. '나'도 없도 '당신'도 없다. 현실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문학이 가져야 할 삶의 보편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카프카의 '변신'을 읽혔다. 그랬더니 '카프카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돼요?' 하며 자신의 환상과 판타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 환상성과 비현실성이 현실에서는 훌륭한 의미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지. 벌레로 변했다, 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벌레로 변한 당위성, 그러니까 그 벌레 자체의 의미가 소설 속에도, 그 소설을 읽는 독자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먹힐 수 있다는 상징이라는 거야.
그래도 그 학생은 이해를 못한다. '그러니까, 네 습작에서 보이는 환상과 판타지는 그저 상상력의 표출일 뿐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문제지.' 그러자 학생이 입을 앙다문다. 아무래도 이해를 못했거나, 아무래도 불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 나도 무기력해졌다. 그래, 어쩌면 내가 늙었는지도 몰라.
박민규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삽화들, 인물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사고체계를 넘겨 본다. 환상과 비현실이 얼마나 잘 상징성을 구축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
냉장고에 모든 것을 넣는 행위는 무슨 상징이지?(카스테라), 너구리의 존재와 너구리 출현의 의미는?(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플랫폼을 걷고 있던 그 기린은 무엇이지?(그렇습니까? 기인입니다), 개복치와 지구와의 관계는(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경유지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걸 작가가 폭로한 건 아닐까?(아, 하세요 펠리컨), 변비환자들(야쿠르트 아줌마)-외계인(코리언 스텐더즈)-대왕오징어(대왕오징어의 습격)-헤드락(헤드락)의 정체는?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잘 모르겠다. 혹, 너구리 하나쯤은 - 혹,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든 외계인 하나쯤은 - 혹, 변비환자들 하나쯤은 알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쌓이다 보니 머리가 아프다. 그 비밀을 풀기가 귀찮아진다. 너무 많이 밀려 있는 생각의 숙제가 오히려 포기를 종용한다. 분명한 건 내가 게으르거나 무지하거나, 혹은 늙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민규 소설을 함부로 '시끄럽고', '튀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이해를 못했음에도 가독성과 재미에 동해서,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언어와하는 작가의 기술적인 능력에 눈이 멀어, 그저 작가의 소설이 좋다고, 그래서 박민규라는 작가를 좋아한다고 외쳤던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그리 훌륭한 독자는 아니었나보다. 박민규 소설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노력을 등한시 했기 때문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썼겠지, 라는 안일함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물론, 내가 평론가가 아닌 이상 속속들이 소설에 대한 칼질을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다만, 내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고민은, 이 새삼스러운 고민은, 기존의 믿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고루해진 사고체계에 때문인가, 내가 정말 고리타분해진 것인가, 에 대한 자문과 상호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민규 소설의 흥미는 단순한 재미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의 불합리와 그 불합리에 대처하는 방법의 다양성, 그 다양성을 만들어야 하는 왜소한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연민에 대한 의미 탐구라는 것도 알겠다. 그러므로 왜 굳이 이런 형태, 이런 형식, 이런 구성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그건 작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식의 발로이기 때문일테니까.
그러니, 어쩌면, 카프카의 벌레와 고3 학생의 봉제인형과 박민규 소설의 너구리는 어쩌면 모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왜 벌레여야 하고, 왜 봉제인형이어야 하고, 왜 너구리여야 하는지. 나비가 아니라, 팽이가 아니라, 수달이 아니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은 창작자의 사고체계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소설이란 세계와 나의 소통을 돕는 구조로 작용한다고 믿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민규 소설에 대한 찬사는 나마저도 혹은 나까지는 할 필요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평론가들과 매스컴과 독자들의 신뢰는 이미 이 작가에 대한 입지를 굳건히 만들고도 남을만큼 넘쳐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그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욕망은, 내가 늙지 않았음에 대한 항변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오히려 늙음에 대한 깨끗한 인정을 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처럼, 어느날 갑자기, 내가 키우는 페릿 샤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안녕, 아줌마. 나도 아줌마를 사랑해.' 라 말하며 내 품으로 기어들어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때야 비로소, 나는, 카프카와 고3 학생과 박민규의 벌레와 봉제인형과 너구리에 대해서, 그제야 정말 완벽히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