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한때는 경찰서를 집으로 알았다. 물론 그곳은 홈 스위트 홈 따위는 아니어서, 걸레를 빨던 쫄병시절부터 팬티마저도 파란 경찰서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국방색 깔깔이를 입고 소일거리를 하던 쓰레기시절까지 나는 그저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 경찰서 바깥 풍경을 보며 뻐금뻐금 연기를 내뿜곤 했다. 마치 답답한 어항에서 헐떡이는 금붕어처럼. 곧잘 넘곤 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담벼락 보다도 낮은 담의 바깥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세상'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결코 넘을 수 없었다.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은, 그냥 꼼짝없이 담배만 필 뿐이었다. 경찰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테마모텔'에 들락거리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언제나 후일담은 아름다운 것이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이 불편하다. 너도 나도 군대 이야기를 할 때에야 때때로 그에 걸맞는 에피소드 한 두 개쯤은 꺼내 놓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은 내 안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기억들을 나는 다락방처럼 어두운 곳에 몰아 넣었고, 당연히도 그 문을 다시 열기는 힘들다.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와락, 하고 쏟아져버릴지 모르니.
경찰서에 있을 때부터, 그러니까 상황실이니 지령실이니 하는 사무실에 앉아서 인터넷을 뚜닥 거릴만큼 '짬'이 된 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결국 지금에야 읽었다. 별로 읽고 싶지 않았던 책들도 꽤 많이 읽은 것을 보니 기회가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단지 그럴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겠지. 그렇다고 지금이 그럴 때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작가의 소설을 읽고보니 한 번쯤은 정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바로 그 때 부터였다. 물론 그 전까지 끄적여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나는 무엇인가를 끄적이는 사람이었지만, 구체적인 결심은 그랬다. 4월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12사단 훈련소를 나온 후 옮겨 간 충주 경찰 학교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러니까 스스로, 포돌이가 그려져 있는 노트를 산 일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곳에 하드 보일드 SF 소설의 시놉을 적어 내렸다. 뭔가 문학적인 이유였겠지. 편지를 굳이 쓰고 싶은 친지가 별로 없었다던지 하는.
물론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서 검문을 하던 쫄병 시절에는 잠시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맑스 베버니 하는 것을 읽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이도 국 간이 안맞는다거나 밥이 되다거나 할 때면 어김없이 손을 들었다. 손에 펜을 잡고 무엇을 쓴다해도 근무일지나 검문검색일지요, 컴퓨터를 친다해도 주민 조회이거나 조서 작성 뿐이었으니, 애초에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검문을 하고, 지문을 확인하고, 때때로 기소중지자나 무면허 운전자를 잡았으며 매일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가끔씩은 부엌 냉장고에서 사놓고 남은 콘 하나를 바지 춤에 숨기고 쓰레기 장 앞에서 먹기도 했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이 채 막바지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짧은 초소 생활을 마치고 경찰서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백여 명의 기소중지자와 그보다 조금 적은 무면허 운전자를 잡은 후의 일이다. 그곳은 지난 몇 년간 전국 초소 실적 1, 2위를 다투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때론 맞고, 10차선 고속도로 중앙 입초대 위에서 춤도 추었으며 무전기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때때로 쉬어가는 대형 화물차의 운전석에 난입해 초소를 들이받아 버릴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형 면허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유난히 나를 괴롭히던 고참이 있었다. 모두 두 명이었다. 그리고 역시, 모두가 그렇듯, 그 중 한 명과는 친구가 되었고 그 중 한 명과는 원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세명이 길을 가면 한 명은 반드시 나의 스승이다'라는 옛말을 '세명이 길을 가면 한 명은 스승이고 한 명은 개새끼다'로 바꾸어 믿었다. 이것은, 황금율이다. 진리고 아니고를 떠나서 구조적인 완결성이 있다.
경희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그 친구는 사소한 일들로는 때리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하에서. 휴식 시간에 내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내게 자신의 옛 사진을 보여주고, 그 중 단발머리를 하고 나시티를 입은 그의 프로필 사진에 내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을 때에도, 따라 웃으며 그저 대가리박기만을 시켰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적절한 예는 아니다. 어쩌면 코메디 배우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발령 한 달 만에 나는 처음으로 웃었다.
언젠가 그는 상경 정기휴가를 다녀온 뒤, 나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애들 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같이 새벽 근무를 서던 그는 나에게 화가 났다. 그럴만도 했다. 그때 나는 라면 국물을 너무 많이 혹은 적게 넣었거나, 파 마늘 양파 등의 양념을, 라면 봉지 뒷편에 써있는 조리법과 달리 그의 기호를 무시하고 내멋대로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사답게 자신의 말을 지켰다. 대신에 나를 초소 옆의 테니스장으로 끌고 갔으니, 그때 시간이 새벽 2시. 팬티만 입은 나는 테니스장에서 코트를 수백 바퀴 '선착순'으로 돌고(어째서 혼자 뛰는데 선착순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대가리를 박고, 팔굽혀 펴기 및 앉아 일어나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피티 팔번 따위를 셔플로 반복했다. 그가 비로소 나를 용서하기로 한 것은 해가 뜰 무렵이었다. 단순히 팬티만 입은 내 모습이 창피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면 바지런한 화물기사들이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던 것이다. 테니스장의 담은 높았지만, 화물차도 역시 높았으니.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차렷을 시켰다. 팬티만 입은 나는 차렷을 했다. 그렇지만 내 다리는 O 다리였고, 당연히 차렷 자세의 기본인 '무릎과 무릎을 붙인다'가 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조차도 '내가 너를 다리 휠까봐 몇 번 업어주지도 않았는데, 너는 어찌 이러냐'라고 하실만한 다리였으니, 그가 좋아했을리 없다. "어쭈? 이게 차렷이야? 장난하냐?"라는 그의 말에 나는, 구조적 결함들을 눈부신 의지로 극복해온 선조들을 본받아 붙을리 없는 O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더이상 펴지지 않으려는 뼈와 어떻게든 붙이려는 힘줄이 충돌해 다리는 그저 제자리에서 덜덜 떨릴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떠냐? 왜, 무섭냐?" 태어나서 그처럼 강렬한 살의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와는 같이 발령을 받았다. 같이 경찰서로 온 그는, 경찰서에 줄줄이 깔려있던 고만고만한 고참들 때문에 더이상 실세는 아니었고, 늙고 힘빠진 영감쟁이가 마누라 찾듯 나와 친해졌다. 발령 후 그는 수염뽑힌 고양이처럼 조용히 지냈는데 다만 밑의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 팔굽혀 펴기를 100개씩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물로 내 팔도 쑥쑥 두꺼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고, 나 역시 슬슬 중간 짬밥이 되었을 때 나는 다른 고참과 팔굽혀 펴기 내기 탁구를 해서 체력 단련장에서 팔굽혀 펴기 100개를 해야만 했다. 다시 돌아간 내무실에서 그는 나를 활짝 반기며 "야 이제 팔굽혀 펴기 해라. 다 모여"라고 말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하며 내 팔 상태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그는 마치 연장 10회에도 선발 염종석을 고집하는 강병철처럼 나에게 팔굽혀 펴기를 요구했다. 나는 마치 돈도 못버는 주제에 잠자리에서만 괴롭혀대는 남편을 둔 부인의 심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씨발, 전생에 무슨 팔굽혀 펴기 귀신이 붙었나..." 생각보다 그의 귀는 밝았고,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 나는 맞지도, 그렇다고 팔굽혀 펴기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쩐지 짬이 먹을 수록 점점 성인군자가 되었고, '이순'의 경지에 올랐다. 그 후로 단지 한 일주일 정도만 나와 말을 섞지 않았을 뿐이다.
개새끼는 맑스 베버를 읽던 역시 경희대 사회대인가 뭐시긴가를 다니던 놈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똑똑한 새끼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대충 그 무렵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사건이 있은지 일주일 후, 어느덧 봄에 눈녹듯 응어리를 녹인 그가 내게 말했다. "아 씨발 나는 이제 제대하면 뭐하나 싶다. 너는 임마 아직 그런거 모르지? 너도 다 제대할 때 되봐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극영화가 다니신다 아님까." "그래서?" "보아하니 배우는 아닌거 같고, 감독할꺼 아님까?" "(꿈틀)... 야 씨발 그게 쉬운줄 아냐? 걔네들은 다 천재야 천재. 감독은 천재만 되는거야." "그럼 어떡함까?" "그러니까 씹새야..." "뭐 잘하는 거 있슴까?" "(발끈)... 씨발놈아 그러는 너는 뭐 잘하냐?" "저 국문과다 아님까." "그래서?" "저 글 잘씀다." "씨발 그래 잘났다. 너 그럼 어디한번 소설이나 써와봐라." "소설 말임까???" "그래 소설." "에이, 제가 그걸 어떻게 씁니까. 소설 쓰는 애들도 천잽니다 천재." "개새끼 너 글 잘쓴다며? (정색) 지금 고참 갖고 논거야?" "일주일 후에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습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근무시간 내내 쓴 것은, 사소한 일이 비탈 굴러 산사태 되듯 커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처음 일주일 동안 원고지 150매 분량을 정말 재미있어하며 썼고, 도저히 끝이 안나서 일주일의 기한을 더 얻어 쓴 나머지 120매는 어쩐지 귀찮아져서 대충 썼다. 플롯이고 교훈이고 뭐고 없는, 말빨로 이루어진 유사 커트 보네것 (혹은, 이때는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더글러스 애덤스) 류였다. 그 후로 그는 나에게 진로에 대해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돌고 돌아 그것을 읽게 된 우리 분대장이었던 김경장이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니는 씨발 소설을 쓴대는 노미 이게 뭐고? 거 왜 있다아이가, 가스나들이랑 한판 하고. 뭐 그런거 없나? 이런걸 누가 읽겠노."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것도 그 곳의 부산일보였고, 되도 않는 경장편을 쓴 것도 그곳을 나오기 직전의 일이다. 뭐 그랬다. 그곳에서 나는 닭도리탕과 제육볶음을 배웠으며, 매운탕에는 간장을 넣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생선의 껍질이 까지지 않게 굽는 법과, 계란 후라이 노른자를 터트리지 않고 동시에 4개까지 하는 법을 배웠다. 파와 양파와 마늘을 다루는 법을 알았으며 국 간을 맞췄다. 훈육의 힘. 내가 제일 자신있던 것은 북어국이었다. 간단했고, 쉽게 맛이 났다. 물론 그것들은 내 팔이 도로, 아니 전보다 더 얇아짐에 따라 내 머리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 시절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그의 잡다한 소설을 읽으면서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다시 말해 그의 소설은 잡다하다. 고만고만한 등장인물들이 때로는 30명 씩이나 등장하는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니, 잡다할 수밖에. 사람 사는 이야기는 잡다할 수밖에 없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추릴 수 있는 것은 영화나 소설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좋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구수하게 물씬 풍겨서 좋았다. 비록 경찰서의 생리나 그 중에서도 검문 초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덜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다. 나쁜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다. 개 같은 초소장(경찰)도, 나름대로 윤리적 삶에 대해 고민하는 대원(전경)도,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단한 삶을 위안하기 위해 섣불리 '적'을, '타인'을 규정하는 일과는 사뭇 다르다. 잘못된 것은 언제나 구조이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조 안에 적을, 타자를 규정해버리고 모든 잘못을 그에 돌리는 것은 그래서 나쁘다. 물론 그렇지만 여전히 개새끼들은 존재하고 그 중의 누군가는 맑스 베버를 읽겠지만.
사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하다.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위험하다. 너무나 직설적으로 경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그렇게 분리되고, 2년 동안 나라를 위해 국방의 의미를 충실히 수행한 애국자들은 그대로 국가 경제의 중추가 되어 권력을 얻는다. 여자들이 괜히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김종광은, 그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모든 경계를 무화시킨다. 그러니까 개새끼들아 군대 얘기하면서 그렇게 지랄하지 좀 말란 말이야, 라고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같은 전경 출신의 작가라고 은근 반가운 것을 보면 그 '공감대'라는 것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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