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때 내 짝꿍은 글씨를 참 잘쓰는 아이였다. 나는 짝꿍을 따라 허리를 펴고 앉아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짝꿍처럼 금세 내 공책에도 선생님의 별 도장이 다섯개 찍혔다. 중학교때 내 앞에 앉은 친구는 영화광이었다. 명화극장은 물론이고 EBS 세계의 명화까지 섭렵하고 있어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텔레비전 영화를 보았고 다음날 우리는 영화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대학교때 친구 역시 나보다 월등한 글쓰기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등을 보며 서툰 다짐을 하곤 했다. 나도 글을 쓰리라. 결국 나는 졸업작품을 제출했고 호평을 받았다. 그렇게 수많은 친구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던 목록을 내게 나눠주고 사라졌다.
매일 2등만 하던 화자가 1등을 하던 친구 P를 이국땅에서 재회한다.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P는 승승장구하는 삶이었다. 누구도 그를 따라갈 수 없었을 만큼 P는 천재적이었다. 화자는 현재 작가주의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얻고 있고 P는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접고 북유럽 작은 마을에 기거중이다. P는 화자가 흠모했던 여자의 남편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화자는 P의 천재적인 생활 이면을 보게 된다. 그는 알콜홀릭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한 여자에게 그늘일 뿐이다.P가 1등을 유지하기 위해 남몰래 숨통을 조이고 알콜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면은 화자에게 아픔이다. 몰랐으면 좋았을 뻔한 그림자다. P가 있었기에 어쩌면 자신의 삶도 지탱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외롭고 쓸쓸하다. 친구들이 내게 물려주고 떠난 곳에 나는 혼자 있다. 어떤 점술가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더 뛰어난 사람은 나의 언니였노라고. 매일 책을 보는 언니를 따라, 매일 음악과 글 쓰는 것을 즐기던 언니를 따라 하던 나는 지금도 음악과 글에 몸달아 한다. 자신이 꿈꾸는 욕망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이 꿈꾸던 욕망을 빼앗아 살아가기도 하는 인생이란 오묘하기 그지없다. 참 쓸쓸한 제목의 <밤이여, 나뉘어라> 는 한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쫓는다. 욕망은 인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 P가 비록 알콜홀릭이나 러브피아 라는 신약을 개발하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과 대조된다.
정미경의 소설은 참 독했다. 정미경의 독한 문체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비유들에 매료되어 나는 그녀의 팬이지만 나와는 다른 반찬과 주식을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다른 나라 사람인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미경은 이제 독하고 살벌한 문체가 아닌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문체와 사유로 수상작을 지었다. 그런 작가들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노련하기만 하고 변화가 없는 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정미경은 또 하나의 다른 실패를 틀고 있다. 그 실패에서 뽑은 글들은 어렵지도 독특하지도 않다. 한 쪽 한 쪽 넘기면서 정미경이 쓴 것인가 하여 다시 앞장에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언젠가 대상 수상자가 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작품을 참 오랫동안 떠올릴 것만 같다.
윤성희의 <무릎>의 정원사가 된 소년이 비로소 옹기종기 가족의 무릎을 떠올리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러나 만약, 중학생인 내 조카가 이 얘기를 들려달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를 모아서 말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뭉뚱그려 얘기하는 재미보다 문장 하나하나의 재미가 있는 소설. 기억해둘만한 문장이라기 보다는 레고 블럭을 쌓듯 개별적인 문장들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는 독서지도사인 화자가 7년동안 사귀었던 여인을 독서로 치료하는 이야기다. 후반부의 서사는 전반부에 보여줬던 패기 대신 지루하고 헐거운, 작가의 독서 편력을 자랑하다 끝나버린 것 말고 더 뭐가 있나 하는 허무함만이 남는다. 싸이월드와 삼순이가 꼭 나와야 했을까?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느낌은 김경욱의 딜레마인 것 같다.
구광본의 <긴하루> 는 독특하다. 혼령이 되어 CCTV에 앉아 편의점에 들어오는 행인과 나를 반추한다. 소외와 소통의 당대를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구나 싶어 참신했다. 함정임의 <자두> 는 자두의 모양같은 심장을 자두로 치환하고 있다. 의미를 깊숙이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아 잘 읽히지 않았는데 독자가 변변치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김영하의 <아이스크림>은 참 씁쓸하다. 아이스크림 하나로 번듯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작가이겠지만, 김영하의 날렵한 감각에 옹골찬 의미들이 쑥쑥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은 고무적이다. 김영하도 나이를 먹는구나, 라는 감상은 너무 진부할까? 어떤 문제에 대해 해결하기 보다는 많은 대가로 보상해주는 방식을 취한 빙과 회사와 그 대리인인 김부장. 부부는 여전히 석유 냄새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는 기분이다. 문제를 파고들어 해결하기 보다 은폐하고 조작하고 입 다물라는 식의 현대사회의 병폐는 냉장고를 이탈하면 금세 녹아 없어져버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경린의 <야상록> 은 찬찬히 읽힌다. 조요한 가운데 핀조명 하나만 켜진 무대에 배우가 혼자 서 있다. 배우의 호흡, 발소리는 섬세하게 잘 들린다. 객석에서 기침 소리를 내는 것 조차 침을 삼키는 소리 조차 배우에게 방해가 될 것처럼 관객도 예민하게 된다. 그런 호흡이 절로 나오는 소설이었다. 아비의 삼우제날 유부남 애인을 만나 정사를 치루고 돌아온 금조. 이름도 참 희한하고 특이하지. 발을 내린 별당에서 아이를 재우듯 어미의 한숨은 또 얼마나 지극한지. 관능, 도발, 섬세, 독특한 분위기가 압권이다.
수상자인 정미경의 문학적 자서전은 기대했던 것 만큼 작가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는 않았다. 은유하지 않고 직접적인 서술로 들려주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독자로서 조금 아쉽다. 하지만, 더 많이 알아봤자 다 기억할 수도 없다. 나는 늘 정미경의 소설을 읽을 것이며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한곳에 모아놓은 수상집으로서 올해의 이상 문학상 수상집은 별 네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하는 독자의 사치는 누릴 수 없었다. 왜? 하는 의문만 품게 되는 아쉬움. 소설은 정말 무엇일까? 어떻게 써야할까? 현대 소설이라고 하는 요즘 소설들이 우리의 현실이며 이게 다 인것일까? 자꾸 내 시선은 현대 소설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간다. 가슴으로 읽혀지는 소설이 간절히 읽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