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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데뷔 전후
우리집은 책장이 겨우 두 개였다
지금은 거실, 안방, 침실까지도 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데뷔 전후에
쓴 詩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쓸쓸하다
내 연민에 빠져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흘린 눈물이 내게 다시 흘러와
내 가슴을 적실 때 그 때에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1996년 11월
박라연
언제나, 시집을 펼쳐드는 것은 우연이다. 가끔가다 그 우연은 더욱 기막힌 우연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박라연의 시집이 오늘 나에게 그러한 시집이 되었다. 책을 후루룩 넘기다, 나는 승차권 하나를 발견한다. 2001년 12월 22일로 적혀 있는 그 승차권에는 나에게 익숙한 지명이 적혀 있다. 출발시간은 18시 10분. 2001년 12월 22일 오후 6시 10분에 나는 그 차에 올랐을 것이고, 그 차에서 이 시집을 읽었을 것이다. 승차표가 꽂아 있는 페이지는 34페이지. 그 페이지에는 '치사량의 毒, 그리고'라는 시가 있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지독한 꿈의 냄새에 취해버린 몇 년
夢死할 수 없어 깨어난다
누운 채로 밤새워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그 길에서 만난 세월
이름 모를 분홍색 꽃잎 사이사이
검은 나비가 꽃잎을 빨고 있다
내 몸 가득한 꿈의 냄새가 빠져나간다
한 아비의 마당에
한 어미의 옷섶에 뚝 신문 떨어지는 소리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송이들
너희가 우리를 취하게 했구나
삶은 때로 진부해서 살 만하고
꿈은 때로 지독한 제 몸 냄새로 죽음을 밀어낸다
허약한 일상들은
꿈의 갈비뼈 사이에서 잠이 들고
초 분 시간을 따라 송이송이 꽃이 된다
누군가의 미숙한 사랑이 되고
지상의 하루가 되고 前生이 되고 全生애가 된다
치사량의 毒, 그리고
기억난다. 나는 그날 터미널에서 이 시집을 샀다. 그리고 너에게 가는 길에 이 시집을 읽었고, 너와 헤어져 오는 길에도 이 시집을 읽었을 것이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나는 그렇게 무수히 너에게 가고, 너에게 멀어지면서 수많은 시들을 읽었을 것이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ㅡ 박라연,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1996
시집을 펼쳐두고 시를 옮겨 적는 동안, 쿰쿰한 먼지 냄새 맡아진다. 그동안 나는 이 시집을 펼치지 않았는가보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그 오랜 시간의 먼지가 온통 이 시집에 모여 있었구나. 나는 툭, 떨어진 승차권을 다시 34페이지에 넣어두고, 승차권이 숨겨진 이 시집을 다시 책장에 넣는다. 내 손에 먼지 냄새 배어 그 지난 시간까지 배게 그냥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