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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의 샘터

뺨을 쓰다듬어줘

길고 가는 검지로 피의 회오리를 만들어줘

굳은살 박인 엄지로 이마를 눌러줘

뒤통수까지 관통하는 철의 지문을 찍어줘

사타구니에 두꺼운 책을 떨어뜨려줘

책이 무척 아플 수 있다는 걸 깨우쳐줘

난간 너머로 공을 던져줘

허공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캐치볼을 해보자

망치질을 할 때 이름을 불러줘

이름이 몇 조각으로 깨지는지 맞혀보자

고통은 공통의 심연

고통은 공통의 심연

노래를 지어줘

혼자서만 부르는 장엄한 합창곡을 지어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지. 2017

[출처] 공통의 것 / 심보선|작성자 박동진


시인 심보선은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아픈 측면을 놓치지 않고 시로 쓰는 사람이다.

아픔은 혼자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아픔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프다. 그 가족은 더 아플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아픔은 혼자만의 것은 아이다. ‘우리’의 것이다.

<고통은 공통의 심연>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한 사람이 혼자서 조용히 부르는 노래는 점차 여러 사람이 부르게 되면서,

장엄한 ‘합창곡’이 된다.

사회의 아픈 모습들을 보고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기로 하면서,

그 아픔들은 우리 ‘공통의 것’이라고 적는다.

뺨을 쓰다듬어줘

길고 가는 검지로 피의 회오리를 만들어줘

손에 피가 묻었다. 지하철 문에 끼어 죽은 청년을 생각했을까?

그 피로 뺨을 쓰다듬으며 얼굴에 피의 회오리 무니가 그려진다.

죽어가는 너의 피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한다.

굳은살 박인 엄지로 이마를 눌러줘

뒤통수까지 관통하는 철의 지문을 찍어줘

문 사이에 끼어서 죽어가는 소년의 아픔을 생각했을 터이다.

뒤통수까지 철이 짓누르는 아픔 속에서 삶을 마친 소년.

사타구니에 두꺼운 책을 떨어뜨려줘

책이 무척 아플 수 있다는 걸 깨우쳐줘

끔찍한 고통을 상상하기 위해 만든 문장이다.

두꺼운 책에 맞은 신체는 저릿저릿하다.

인체의 고통은 이렇게 언어를 통해, 책을 통해 공유될 수 있다.

그것의 시의 힘이다. 공통의 것. 공통의 아픔. 공통의 죽음.

난간 너머로 공을 던져줘

허공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캐치볼을 해보자

난간 이쪽의 나와 난간 너머의 너

너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이젠, 서로 다른 공간으로 헤어졌다.

용산 참사, 평택 쌍용자동차의 죽음, 세월호, 최근에는 이태원에서…

그 아픔을 잊지 않도록 공을 던지고 받는 캐치볼을 해 보자.

망치질을 할 때 이름을 불러줘

이름이 몇 조각으로 깨지는지 맞혀보자

망치질을 하던 노동 현장에서 이름조차 깨져서 사라져버린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의 망치질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이제 사라진 그들의 이름을. 그렇지만 우리들 공통의 마음에 남아있는 아픈 이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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