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만화, 특히 장편 작품을 읽고난 뒤면 항상 '납득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소설의 경우엔 책을 펴보기도 전에 질려 버리는 '부담감', 책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부담감은 더더욱 무겁기만 합니다.......반면 만화의 경우는 읽는 속도는 소설보다 몇 배나 빠르지만 장대한 스토리가 빈약해지거나, 배경은 거창한데 그에 비해 주인공들의 세밀한 감정이 축소돼버려......"(작가 후기에서)
이런 이유로 소설가 겸 만화가 겸 패션 모델 겸 가수인 작가 D[di:]는 이 '노블코믹'이라는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언뜻 카툰 에세이류가 아닌가 오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부터 그런 오해는 불식된다. 정통만화책의 박스식 편집, 하지만 그 박스마다 채워진 엄청난 양의 활자, 그리고 활자가 감당하기 버거운 임팩트가 요구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건조하고 그로테스크한 양식의 만화,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말풍선들.......이것이 노블코믹이다.
하지만 '소설의 표현력+만화의 속도감'을 기대하고 책을 펴자마자 난 '소설의 치밀함+만화의 상징성'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예상했던 독서시간을 서너 배 초과한 것은 기본. 덧붙여 우울함과 그로테스크함의 범벅이 덕지덕지 내 시간에 늘어붙어 영 떼내지지 않는다. 하긴 작가의 전작 [엔젤미트파이]의 존재감을 알면서도 헛된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내가 생각하는, 소설독서의 '매니아'는 다분히 나, 개인적인 해석의 소산이다. 그것의 요건은 첫째, 전형적 플롯과 스토리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 플롯과 스토리를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 된다. '전형성'이 모든 예술성을 밀어내는 건 아니니까. 다음 둘째, 취미와 본업의 경계가 모호해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소일거리야, 하며 독서와 자기 삶을 한참 멀게 떼어놓는 태도는 매니아의 태도가 아니다. 혹 그것이 사실일지언정(대부분 사실이다) 독서의 광희와 그 여운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전적으로 자기를 몰입시킨다. 그것이 매니아다. 흠, 여기까지 써봤더니......나는 매니아가 아니다.
[인형옷 마을로 오세요]의 주인공 도시는 철저히 유원지 운영을 위해 세워진 '인형옷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떠나고, 돌아오는 운명의 인물이다. 미남, 미녀가 아닌 거주민은 몽땅 귀여운 '인형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그 마을의 영향력을 도시는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반항의 대상의 의미에서든 그리움의 대상의 의미에서든 도시는 인형옷의 감각과 마력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간다.
"인형옷이 덮고 있는 건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정신까지도 인형옷에 꽁꽁 싸여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덮어버린 '거짓'의 또 다른 이름."(p.131)
인형옷을 입는 대가로 마을은 유원지의 수입을 받아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 마을 주민들은 그 삶에 침잠하여 '바깥'에는 눈도 돌리려 하지 않는다. 가정마다 유리로 된 '전시실'을 만들어 밖을 오가는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의 사생활을 눈요기로 제공하고, 학교에서는 무슨 '관광 과목' 같은 걸 잔뜩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가식의 상징인 인형옷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꽁꽁 싸고 있다. 도시는 결국 자기와 마음이 맞는 두 친구-바닐라와 마망-와 함께 '바깥'으로 도망친다. 그에게는 막연하기는 하지만 뭔가 '예쁜' 것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픈 꿈이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물론 마을 밖 숲에 진을 치고 마약소굴을 여는 등 신비주의 냄새를 팍팍 내는 G 지구, 관광객들에게 불손한 주민들을 잡아가둬 세뇌교육식 개조사업을 벌이는 뭉게뭉게 수용소 등 불편한 요소들이 많기는 하지만 너그럽게 참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작가 D는 본격적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탈출한 도시 앞에 놓여진 현실, 그것은 '바깥'에 나가니 '중앙'(토쿄 같은 대도시를 의미하는 듯함)이라는 또 다른 '바깥'이 있고, '적나라한 현실'은 '인형옷이라는 가식'보다 훨씬 차갑고 적대적이라는 사실. 도시는 영혼과 육체 모두에 생채기가 끊이지 않는다. 따뜻했던 우정도 더 이상 보금자리가 돼주지 못한다. 나아가 그 차가운 '바깥'은 제정신을 가진 인간, 꿈을 간직한 인간을 모조리 바보, 천치, 머저리로 멸시하고 내치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 도시, 그는 마침내 '거짓'의 또 다른 이름 '인형옷'을 그리워하기에 이른다.
불편하다, 읽기 힘들다, 그로테스크하다.......하지만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우리의 고뇌와 삶의 여정에서 한결같이 우리를 덜 고뇌하게 하고 중도에 여정을 포기하게 하는 '전형성'은 눈꼽만치도 없다. "착한 사람이 잘 되게 돼 있어", "우리집이 젤 좋아",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등의 판에 박힌 말들, 그것들은 정말 눈물나리 만큼 고맙게도 청춘기의 우리를 잘도 위로해줬었다. 하지만 이제 와 나는 그 위로의 말들을 내가 믿지 않으면서도 너무 지쳐 수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인형옷 마을로 오세요]는 그 말들에 대한 수락이 아니라 거절의 산물임을, 그래서 '위안이 필요없는 매니아들의 필독서'임을 인정하고 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