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을 '깔아보는' 지적 독서 취향은 여전히 존재하며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르소설의 대립항으로서의 '본격소설'이 제도와 결탁하여 공식 문단과 대학 커리큘럼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물론 지적 독서 취향의 '거드름'도 차차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재 제도권 밖에서 '정전'(canon)의 문법과 장르소설의 문법을 아우르는 시도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수의 장르소설이 영상물의 서사로 변모해,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정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예가 잦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까지는 거의 국외 저작물에 한정된 현상이지만.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지속적으로 정전의 신비를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 '엄숙성'의 구속을 지긋지긋해 하는 축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가끔씩 장르소설을 손에 쥐어본다. 그 전제는 역시 "장르소설의 모종의 문법이 보다 자유롭고, 심도 깊은 문학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의 장점도 위의 문제 제기 안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환상문학의 기법으로 인한, 섬세하고 직접적인 '타자의 내면 탐험'이다. 어느 평범한 여자 경리가 "애인으로 추측되는" 유부남 출판 관계자의 집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전후 상황은 그녀가 자살한 것임을 뚜렷이 증명하지만 아주 사소한 의문거리가 남아 있다. 사체의 머리에 자그마한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애인'이 죽은 여자와 애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는 것. 이 상황에서 '본격소설'은 그녀의 죽음의 비밀을 풀기 위해 어떤 서술 방식을 택할까. 당연히 간접적인 방식일 수밖에 없다. 모종의 인연으로 인해 어떤 인물이 죽은 여자의 주위를 탐문하며 실마리를 캐고,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추측하고, 최종적인 '의미'에 도달하는 것, 이런 방식이 소위 '정통적인' 방식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장르문학에 속하는 '추리문학'의 문법일 수 있겠지만, 본격문학이라면 추리의 논리 전개를 따르면서 다양한 삶의 가치 문제를 결부시키는 식으로 '싸구려 냄새'를 희석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지난한 도정인가. 죽은 주체의 내면을 '산 주체'가 더듬으며 어떤 식으로든 복원하려 애쓰는 일이란.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는 그렇지 않다. 죽은 여자를 '유령'으로 등장시켜 고백하게 한다. 그녀의 내면은 '산 주체'인 그녀가 죽은 집의 새 입주자 누마노 와타루 앞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이것은 환상소설이다!"라는 장르소설의 코드를 인정함으로써 이 모든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내면고백만으로 죽음의 비밀이 밝혀지지는 않으므로 여기에 추리소설의 문법이 개재된다. 누마노는 한편으로 그녀의 존재를 집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또 한편으로 그녀에게 묘하게 매혹되어 탐정처럼 그녀의 주변을 캐고 다닌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결과를 말하고, 그녀와 함께 해석하고, 그 와중에 죽기 전의, 그리고 죽은 후의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그녀의 현실의 죽음이 수수께끼인 것처럼, 죽은 그녀의 내면도 수수께끼 투성이다.
모든 소설은 보편적으로 '개연성'의 구속에 시달린다. 이것은 소설의 이해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면서 글쓰기의 거침 없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덜컥거리게 만든다. 장르소설의 미덕이란 이 점에서 귀중하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우리는 환상소설과 추리소설의 문법에 기대어 이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유령의 내면에 직접 뛰어들어, 단지 살인 사건 그 자체의 비밀을 밝히는 걸 넘어서 이 북적대는 도시공간에서 외로움과 사랑의 열병에 시달렸던 한 여자, 나아가 그 여자가 대표하는 모든 일상적 주체들의 지금, 이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이 책은 책장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위의 잡설을 다 폐기하고, 좋지 않은가, 우리 일상에서 이 정도의 기분 좋은 흡인력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