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서평공장



'콧수염'은 매개다. 주인공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교란하기 위한. 콧수염을 깎은 자신의 변화를 못 알아보는 아내, 직장 동료들. 그들이 알고 있는 '나'는 전혀 다른 페르소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콧수염을 기른 나'도, 지인들이 알고 있는 '콧수염이 없는 나'도 결국은 타자들에 의해 구축된 자기정체성, '가면-페르소나'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기억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주인공은 정체성 혼란에 어쩔 줄 모른다. 귀중한 기억들이 타인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무화되고, 낯선 기억들이 역시 타인들의 '인정'으로 사정없이 틈입해 들어온다.

인상 깊은 장면은 주인공의 탈주지 홍콩의 부두이다. 그는 시선만으로 자신을 해체, 재구축하는 타자들을 피해, 낯설어서, 그래서 비존재와도 같은 외국인들 틈에 낀다. 그리고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왕복 페리선에 몸을 맡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념에 젖어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머지 여생을 이렇게 보낼 수도 있다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건조한 뱃고동, 승객들의 지껄임, 홍콩 근해의 더러운 바닷물, 승무원의 줄 선 제복.....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그 이미지들만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주인공은, 나는 고정된 실루엣으로 좌석에 앉아 있다. 절대 불가능하지만 한번쯤 누구나 꿈꿔봤을 시공간. 이 책으로 인해 다시 꿈꿔보았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