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으로 97년에 발표된 이창동의 영화 데뷔작 <초록물고
기> 촬영일지의 한 대목을 감상하면서 이 글을 끝맺자. 이창동 자신이
직접 기록한 촬영일지다.
"영화촬영 현장이란 때때로, 또는 자주 소외의 구조 속에 빠질 때가
많다. 역할이 작을수록 중심에서 멀어진다. 중심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지금 어떤 장면을 찍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장의 변두리에서 고객를 파묻은 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작업에 임할 수 있는 열
린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이런 소통의 정신이 바로 인간 이창동의 힘이다.-89-90쪽
철사장(鐵砂掌)은 중국 무술에 있어 최고의 파괴력 및 살상력을 발휘
하는 최강의 장법을 가리킨다. 철사장의 연공에 힘써 고도의 경지에 이
른 고수는 타격시 일체의 외상을 남기지 않고 적의 내부 또는 내장만을
상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철사장 숙련자의
일격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중상을 가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수자가 극히 제한되어 왔다고 한다.
박근혜나 문성근처럼 한꺼번에 철사장 수백만 개를 날리는 것과 같은
규모의 대중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파괴력의 원
천을 따져보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고민해야 마땅하다. 철사
장의 전수자를 극도로 제한했던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126쪽
당대에서는 김민기처럼 "결코 혁명을 서술하지 않았지만 모든 혁명
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한 번도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저항의 깃발이 되었던" 특별한 이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
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166쪽
이제 마지막으로 IMF때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기 자식의 새끼손가
락을 자른 사건에 대한 김근태의 가슴 저린 얘기를 들으면서 이 얘기를
끝맺자. "아이는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어 엄지손가락으로 도장 찍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의 손가락은 계속 자랄 것이고
아이는 계속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 새끼손가락을 걸어 미래를 기약하는 약속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사람이 김근태
라고 나는 믿는다. 김근태는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
이다.-206쪽
문화방송에 노동조합이 생겼을 때 '덜컥' 가입원서를 냈던 손
석희는 왜 노조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
니다. 운동가까지는 못 되더라도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 소시민
적 도덕성을 지키려고만 해도 노조활동은 불가피합니다."-270-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