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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기간 석 달짜리 형사가 될 거라 생각했던 나는 꼬박 30년 동안 형사로 살았다. 현장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쉽게 헤아릴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마음과 표정을 보았다. 그 끔찍하고도 서글픈 마음들 속에서 헤매고 당황하고 깨지면서도 떠나지 못했다. 형사가 내 밥벌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곧 사람의 일이었고 결국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P16
경찰이 지탄받을 때마다 매뉴얼 점검에 앞서 최전선에서 뛰는 실무자 개개인이 집중포화를 받는 것이 언제나 가슴 아팠다.- P19
형사는 취조의 달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취조란 형사가 확신과 정답을 바탕에 깔고 자백을 토해내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형사란 내 앞에 앉은 한 사람,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이 세상을 향해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P30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여성학을 공부하고, 여러 지탄과 공격 속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소신을 지켰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책과 이념으로만 보았던 ‘여성문제‘가 제 삶의 문제로 쳐들어온 순간에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았다. 토악질나는 범인의 오물을 입에 담고서 경찰서로 걸어오는 길, 그 처절한 2킬로미터의 길이 그녀에게 얼마나 천길만길 낭떠러지 같았을지 나는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길을 건너온 당신은 진심으로 옳았다고, 그녀에게 분명히 말해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수사한 경찰들에게도 우리가 옳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P37
나는 세상이 추앙하려 하는 그 범죄자를 잡아다가 실체를 밝혀야만 했다. 세상 나쁘다고 탓하면서 자신이 나쁜 줄은 모르고, 세상 억울하다 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타인에겐 한 치의 죄책감도 표현한 적 없는 그를 나는 붙잡아야만 한다. 그는 영웅도 의적도 아니고 스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야 마땅한 죗값을 치르는 일조차 거부하고 억울하다고 도망침으로써 또 한번 인간의 약속을 저버린, 인간 세상의 규율을 깬 한낱 범죄자일 뿐이다.- P44
삶이나 현장이나 매한가지다. 먼저 가본 자와 나중에 그 길을 걷는 자가 서로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을 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본 자라서 품고 있는 두려움과 안 가본 자라서 끓어오르는 용기를 서로 나누고 자극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P54
사람이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뜸 불쾌함부터 느끼는 심리의 기저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이 불쾌함은 너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P66
두 시간 넘도록 범인에게 ‘날 믿어라, 당신이 날 믿어주면 나는 당신을 돕는다, 내 말만 들으면 절대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온갖 말들로 설득해놓고도, 결국엔 수갑을 채우는 것이 나의 원칙이고 일이기에 안면몰수하고 범인의 손목에 수갑을 걸 때마다 인간적으로 난감했다.- P72
우리는 흔히 마음이 아프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대화 양상이나 욕구가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똑같다. 아프나 아프지 않으나 제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상대에게 강조하고 싶은 감정은 거듭 입에 올린다.- P73
조직을 또다시 축소 개편하면서 나를 받아야겠다는 것이 지금 대장의 의견이란다. 서너 번을 거절하다가 대선배의 한마디에 바로 갔다.
"조직생활 하는 사람이 그래도 조직이 부를 때는 못 이기는 척 가기도 하는 겁니다."- P81
 조직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흐름이나 여론에 따라 보여주어야만 하는 정책이 있다. 실패할까 우려되지만, 그래도 해보는 수밖엔 다른 길이 없는 정책들이 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두려운 일일지라도 현장 실무자들이 부디 성공시켜주기를 바라며, 신중하게 바둑돌의 결정적한 수를 놓듯이 조직은 인재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P83
"월급에는 야단맞는 일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그리고 월급의 크기만큼 야단도 더 크게 맞는 법이고."
(중략)
‘내가 꼴랑 이 돈 받고 왜 이런 개망신을⋯⋯‘이라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떠는 것과 ‘욕 듣는 것도 내 일의 일부다. 초짜면 이런 야단도 맞지 않는다. 월급 더 챙겨받고 일도 더 하니깐 욕도 먹는 것이다‘ 내려놓으며 홀홀 가벼워지는 것은, 오늘 벌어진 일은 동일하되 내일은 전혀 다른 나를 만들어낼 것이다.- P85
조직은 개인의 대척점에 있거나 개인의 꿈을 막아서는 괴수가 아니다. 다만 조직도 하나하나의 개인처럼 살아가고 실수하고 성장하고 실패하고 다시 욕망하고 희망하면서 가만히 한자리에만 머물 수 없는 유기체일 뿐이다.- P85
우연한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거북하고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두려움은 결국 나의 선입견과 편견이 먼저 작동할 때, 그리고 끝없이 내 자의식에만 몰두할 때 더 커진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때 내 불안은 증폭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의 자의적인 해석을 경계하면서 어떤 평가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먼저 진심으로 다가설 때, 그들도 진심을 내보이고 형사의 진심을 느낀다.- P91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란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시작되지 않을뿐더러 기대할 수도 없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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