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Opera Aperta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사죄까지 하며 납치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일본이 수용하지 않자 해법 도출이 불가능해졌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전원 귀환‘이라는 넘을 수 없는 허들을 설정해 납치 문제를 ‘영구미제‘로만든 것은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지위에 서게 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처지의 뒤바뀜에서 일본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는 저널리스트 후나바시 요이치의 말은 일본인들의 심리를 정확히 대변했다.- P110
미국의 원폭 사용을 규탄하고 침략전쟁에 대한 자기비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피폭의 비극을 인류의 평화에 대한 보편적인 염원으로 ‘탈역사화‘함으로써 일본의 ‘원폭 피해자 정체성‘은 공허함을 면치 못했다. 이 정체성에 기반한 전후 평화주의가 일본 사회에 공고하게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러다 2002년 ‘가해자가 있는 피해자의 처지에 설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1970~1980년대 일본인 납치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은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가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피해자 정체성을 획득하도록 했다.- P111
납치 문제는 탈냉전 이후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원됐다.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이 2010년대 일본의 안보화를 추동하기에 앞서 납치 문제는 2000년대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을 이끌었다. ‘커튼 뒤‘에 가려진 중국을 직접 겨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의 납치 문제는 일본의 안보화를 추동하기 위한 국민적 지지의 기반이자 동력으로 활용됐다.- P113
중국과 대만이 1970년대 들어 영유권을 제기하게 된 것은 1968년 유엔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가 동중국해 일대 해양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센카쿠 열도 주변 해역에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P117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고삐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 불황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덮쳤고, 그 위에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이 점화되면서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열망이 확산됐다. 그러나 이를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리더십은 없었던 것이 일본의 한계였다.- P134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