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들이 연변의 경제적 성공과 중국의 경제적 성공을 구별 짓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변은 분명 중국 영토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중국 땅은 아닌 것처럼, 다른 중국 지역과는 별개의 구역인 것처럼 언급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한족을 ‘중국 사람‘이라 부르고, 자신들은 ‘조선족‘이라칭하며, 조선족과 ‘진짜‘ 중국인을 구분하는 언어 습관을 보였다. 한국계 중국인이 스스로를 가리켜 칭하는 ‘조선족‘이라는 명칭에는, 자신들이 한족과 동일한 시민권을 누리지만 민족적으로는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구별 짓기를 통해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정착민의 후예임을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P59
나는 국경과 변경지역이라는 개념이 분단된 조국에 인접하며 거주하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원리로 작동하는 순간을 자주 목도했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의 지리는 그 지역 사람들이 처한 정서 조건, 즉 ‘변경지역에 사는 정착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P60
연변은 예측 불가능한 한국, 중국 등의 나라와 북한을 잇는 통로이자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처럼 변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연변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는 요소로 작용했고, 그 결과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남북한 모두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P61
변경지역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모호한 공간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변방인의 시야와 주변화된 느낌과 함께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라는 경계에 선 감각을 심어 놓는다. 또한 변경지역은 사람들이 "양면적" 세계를 한눈에 담으면서 지배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과 복합적 정체성까지 표출할 수 있는 중첩적, 중층적 공간이기도 하다.- P62
조선족은 연변에 소속감을 가지면서도 불편함 또한 느끼는데, 이는 연변이 편안한 민족 구역인 동시에 더 큰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하는 국지적 변경지역이기 때문이다. 연변은 조선족의 민족적 중심지이자 집거지이다. 나는 조선족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소외된 변경지역을 떠나려 애쓰면서도, 민족적 집거지로서 연변에 깊은 안착감을 느끼는 순간을 자주 목격했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 개혁으로 재편된 소수민족 변경지역 연변에는 바바가 말한 "낯섦" (떠나고자 하면서 머물고자 하는 이중적 감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연변 주민들은 ‘이주의 바람‘에 강한 친화성을 보이면서 외부 세계와의 적극적인 접촉을 시도해왔다.- P63
1945년 일본이 만주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중국인, 한인, 일본인 간의 민족적 긴장이 만주국 체제 아래 억눌려 있었다. 내가 만났던 조선족들은 자신이 일본과 국민당을 상대로 한 해방 전쟁에 기여했고, 사회주의 혁명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중략)
그러나 중국 국적의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난 뒤로도, 조선족은 국가적 정체성보다 민족적 정체성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만났던 80세 전후의 조선족 공산당원들은 1950년대 당시 한반도에 대해 느꼈던 감정적·민족적 애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P67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1958년에 시작된 ‘중국 정체성 교육‘은조선족이 중국 공민이며, 중국만이 유일한 조국이라고 가르쳤다.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에게 특히 가혹했다. 조선족을 숙청과 박해의 대상으로 삼은 상황에서, 남북한과의 민족적 유사성이 문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민족성‘을 드러내는 문화와 담론이 중국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며 엄격히 금지되었다.- P68
해럴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문명화 프로젝트로 규정하면서, 중국 중앙정부가 한족 중심의 시각에서 소수민족을 바라보며 후진적이고 미개하고 불결하고 우매하다는 "민족적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들의 주변성을 야기했다고 분석한다. 중국이 1950년대 실시한 민족 분류 프로젝트로서 고안해낸 임의적이고 단순화된 민족 범주는 여러 민족국가-집단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 문화, 정치를 외면한 채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치적 언설 아래 다양한 소수민족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P72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민족 관련 담론은 ‘민족 개념의 활성화‘ 과정뿐만 아니라, ‘한국바람‘에 의해서도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민족의 사례와 차이점을 지닌다. (중략) 조선족은 국제 이주를 통해 국경을 넘는 ‘월경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국제 노동시장에서 조선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자 자산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국경 넘기를 통해 조선족은 자신의 민족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재정의해온 것이다.- P74
지난 30년 동안 연변에서는 한족 인구가 급증하여 전체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족이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을 떠나고, 한족 또한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으로 이주한 결과이다. 이처럼 ‘들어오기와 나가기‘, ‘머물기와 떠나기‘와 같은 다양한 이주의 흐름 속에서 소수민족 지역의 경관이 점차 재편되었다. 내가 조선족들과 나눈 일상 대화에서는 급격한 한족 인구 변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자주 드러났다.- P80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긴장은 ‘민족적 안정감‘과 공존한다. 이 편안함은 민족성에 따른 공간 분리를 토대로 한다. 우선 학교가 분리되어 있다. 조선족과 한족은 서로 다른 학교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교육을 받는다. 그 결과 사회적 연결망 또한 민족적으로 구분되는 경향이 있다.- P81
연변 조선족은 그 민족적 편안함 속에서 자신들이 국지적이고 고립된 소수민족 지구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기도 한다. 다시 말해 ‘연변이야말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인식은 연변이 작고 후진적이며 변방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동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P82
대다수 조선족은 서울을 방문하기 전까지 연변을 벗어나 다른 중국 도시를 가본 경험이 없었다. 한국으로 이주한조선족 대부분에게 서울은 그들이 처음 마주한 가장 큰 도시였다. 중국 도시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애매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조선족이 많지만, 서울은 그들에게 안락하고 친숙한 정서를 주었다. 이처럼 편안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에는언어적 유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한국어로 적혀 있고 누구나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P83
조선족이 대규모로, 때로는 무모하리만치 끈질기게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감행해온 이유는 단지 한국과 중국 간의 엄청난 소득 격차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느끼는 민족적 친밀감 때문이기도 했다.- P84
권헌익이 지적했듯, ‘1989년 이후‘나 ‘공산주의 붕괴 이후‘ 같은 명확한 시대 구분은 냉전을 유럽 중심으로 이해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냉전의 ‘종식‘이라는 획일적인 시대 구분에 기대고 있다. 마찬가지로, 널리 통용되는 ‘포스트 사회주의‘ 역시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난 급진적 다양성을 간과한 용어이다.- P85
나는 ‘한국바람‘이 급격한 경제 발전과 근대적 삶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이 과거와 미래, 정치와 경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징적 매개라고생각한다. 광범위한 국제 이주와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 직면한 조선족은 포스트 사회주의와 포스트 냉전 시대의 교차점에서 생겨난 한국바람에 영향을 받으면서 ‘연변식 사회주의‘ 속에 놓인 자신들의 민족적 위치를 재조정하고 있다.- P86
연변은 주민들이 편안하게 정착하여 민족구역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방의 소외된 소수민족 지역이기도 하다. 연변은 머물고 싶으면서도 떠나고 싶은 복합적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층적 공간이다. 연변은 이 지역에 불었던 여러 종류의 바람에 취약성을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한국바람‘은 조선족이 한국 노동시장과의 민족적·문화적 친밀감을 바탕으로 경험하게 된 개혁개방 경제의 독특한 결과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