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산당은 우리에게 최고의 스승이며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산업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농업이 집산화되었다. 중국도 다르지 않을 참이었다. <농업이 사회주의화되지 않고는 사회주의가 완성되거나 견고해질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험을 참고해서 마오쩌둥은 이렇게덧붙였다. 이 과업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P323
집산화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농민들은 <비애국적>이라거나 <장제스 노선>, <낙오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독립적으로 남길 선호한 농부들이 그들을 <자본주의자>나 <독불장군>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등에 붙이고 다닌 경우도 있었다.(중략)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공동으로 농사짓길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대출이 막혀 버렸다.- P325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음식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나누어 먹고 돈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써야 한다.> 결국 두려움과 시샘 때문에 가난이 표준이 되었다.- P326
여러 성(省)을 담당하던 권력의 상층부에서 나온 한 대략적인 추산에 따르면 지방 간부 중 약 절반이 비리와 연루되어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새로운 권력 집단이 등장했다. 요컨대 당 간부들은 열 가구중 하나꼴로 집에 하인을 두고 높은 소작료를 받고 땅 투기를 하면서 부농처럼 살았다.- P328
당에는 이 모든 문제에 관한 해법이 있었다. 집산화로 가는 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투기꾼과 사재기꾼, 부농과 자본가의 탓이었다. 앞서는 수년에 걸쳐 반혁명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회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적들을 겨냥해서 조직적인 공포정치를 실시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해법이었다.- P332
가축을 도살하고, 재산을 숨기거나 파괴하고, 일에서 손을 놓는 등의 방식으로 표출된 대중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농촌이 집산화되어 간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한몫을 차지했다. 요컨대 서열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당 관리들이 주석의 칭찬 한마디를 기대하며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열띤 경쟁을 벌인 결과였다.(중략) 당 관리들은 곳곳에서 농민들을 합작사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1953년에 약 10만 개에 불과했던 합작사는 1955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60만 개가 넘었으며 전체 농민의 40퍼센트가 합작사에 소속되었다.- P334
수확물을 통제한다는 것은 농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도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P338
대규모 국영 사업체가 개인이나 가족이 운영하던 소규모 시설을 대체하면서 곡물 저장과 관련된 고질적인 문제들 대부분이 통제 불능 상태에 놓였다. 일례로 1954년 1월에 중국 동부의 모든 성(省)에서 곡물이 변질되면서 열이 발생하고 눅눅해지는 문제가 급증한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상하이 한 곳에서만 4만 톤의 곡식에 곰팡이가 슬었다. 질보다 양을 더 중시하는 지방 간부들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의 목표는 윗사람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거두어들였는지 보여주는 것일 뿐 맡은 바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전체적인 무게를 늘릴 요량으로 곡물을 의도적으로 습기에 노출시켰다. 몇몇은 심지어 물을 부어서 부피를 늘리기도 했다.- P344
이런 보고서들 대부분은 인재가 기근의 원인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지적했다. 하지만 8월에 들어 중앙 위원회는 1949년 이래로 발생한 최악의 기근을 <자연재해> 탓으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농촌 사람들을 돕는 대신 곡물과 기름, 면화 등의 물품에 대해 정부에서 정한 물량을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이런 물품들은 하나같이 <도시를 산업화하고 상공업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개혁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