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국어사전 중 하나인 <일본국어대사전>에 기재된
‘이키‘의 항목에는 남녀 구분 없이 사용되던 ‘이키‘가 가세이기(1804-1830)를 지나며 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단어로 일종의 섹시함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키‘가 ‘이키즘‘으로까지 확장되어가는 과정에서 ‘이키‘와 많은 공통적 특성을 지니지만 좀더 남성적 미의식이 강조된 ‘이나세‘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P130
에코가 ‘이나세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것은 문신이었다. 어시장의 인부뿐만 아니라 일하는 데 옷이 방해가 되어 거의 벗은 몸으로 일을 하는 목수, 속임수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 옷을 벗고 주사위를 굴리는 도박사, 옷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을 염려가 있어 맨몸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소방수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옷은 벗되 자신의 하얀 맨몸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에 문신을 하여 맨살을 가리는 것이 유행했다. 문신은 몸을 드러내며 남성적인 일을 하는 목수, 소방수 등에게 있어 그들의 직업을 알리는 일종의 스테이터스가 되었다.- P131
"화재와 싸움은 에도의 꽃"이라는 말처럼, 맹렬하게 불타는 불길 속으로 용감하게 앞다투어 뛰어들어 불타고 있는 지붕 위로 올라가 집을 부수고 불을 끄는 ‘히케시‘들은 확실히 화재라는 무대의 꽃이자 주인공이었다.- P132
물과 불을 모두 관장하는 나리타후도의 이미지는 부동명왕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화염에 휩싸인 용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모습이거나, 바위 위에 서 있는 칼에 화염에 휩싸인 흑룡이 또아리를 틀고있는 모습 등으로 칼과 화염, 그리고 용이 주제가 되는 형상으로 구현되고 있다.
‘히케시‘들은 바로 이 나리타후도의 이미지를 문신으로 새겨 자신의 몸을 지키는 부적으로 삼았다. 우리가 흔히 용 문신이라 부르는 문신의 원조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P133
이렇게 ‘히케시‘의 문신은 ‘이키하고 이나세한 남성의 상징이 되었다. 소설과 가부키에서도 문신을 한 협객이 약한 자를 돕고, 강한 자를 물리치는 이상적 인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중략)
문신은 정의로운 협객의 시각적 이미지로 흔히 사용되었다.- P135
처음부터 이성에 대한 어필에서 시작된 ‘이키‘였기에, ‘이키‘인지 아닌지의 판단기준은 타인에게 있었다. 자신은 ‘이키‘한 사람,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이 보기에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이키‘가 아닌 촌스러운 ‘야보‘로 불리거나 ‘이키‘한 척만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한카쓰‘로 불리고 만다.
상대방의 판단이 전제되어야 하는 지점에서 ‘이키‘는 도덕률을 포함하게 된다. ‘이키‘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에돗코의 도덕률은 다름 아닌 ‘의리‘와 ‘인정‘이었다.- P136
조닌 계층으로 퍼져온 ‘의리‘는 인간이 본래 가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 남녀 간의 사랑(이 또한 한국과는 조금 다른 관념이다), 자비 등을 의미하는 ‘인정‘과 묶여 ‘의리와 인정‘이라는 하나의 세트가 되어, 정서적인 인간관계에 뿌리내린 감정적 도덕률이 되었고, 일본 문화의 중요한 정서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P13
‘히케시‘들은 평소에는 행정조직의 명령을 받거나 때로는 임의로정해진 구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치안유지와 문신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듯, 이들의 형태는 경찰보다는 야쿠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우리가 온몸에 용 문신을 한 사람들을 쉽게 야쿠자, 조직폭력배로 연결시키는 것은 ‘히케시‘와 ‘히케시‘의 조직인 ‘구미‘가 야쿠자와 다름없는 역할을 해왔고, 근대 이후에 등장한 야쿠자도 ‘히케시‘의 대의명분, 즉 약한 자를 돕고 강한 자에 굴하지 않는다는 ‘이나세‘를 표방하며, ‘히케시‘와 같은용 문신을 추종하며 따라 했기 때문이다.- P139
다쓰고로는 에도 시대를 넘어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한 자를 돕고, 강한 자에게 굴하지 않는 ‘이키‘하고 ‘이나세‘한 에돗코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이로써 일본의 마지막 협객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다쓰고로 이후로의 협객은 야쿠자와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에돗코의 미학은 에도시대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50여년이 흘러 196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에서는 다시금 ‘의리‘와 ‘인정‘, ‘이키‘와 ‘이나세‘의 미학을 내세운 영화 장르가 큰 인기를 얻는다. 이른바 임협영화, 즉 야쿠자영화의 전성기였다.- P141
피지배계급이자 다수를 점하고 있던 에돗코의 문화도 당연히 대중들의 문화였다. 언뜻 유쾌하고 해학적으로 보이는 에코의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에 대한 반발과 내일의 삶을 담보할 수 없는 생활에 시달리던 도시 서민들의 권력과 질서에 대한 반항의 산물이었다.-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