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으며, 문화대혁명은 사회공학에서의 대담한 실험처럼 보였다. 서구에서 마오쩌둥에 열광한 사람들은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나 소비에트의 하향식 계획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시위대는 홍위병의 에너지에 감탄했고,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는 마오쩌둥주의의 슬로건을 차용했다.(중략) 계급투쟁, 사회주의의 의미, 혁명운동의 미래 등 문화대혁명의 이슈는 중국 밖에서는 꽤 원대하게 보였다. 하지만 중국 내부를 들여다보면 근저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 문제와 흡사했는데, 쌓여가는 불만, 불만을 분출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거래와 같은 것들 등이다.- P155
많은 서양인들은 중국이 세계혁명의 요체가 되기를 기대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중국을 단순하게 불평등으로 갈라진 현실세계에서 일종의 도덕적 힘으로 보았다.- P157
1970년까지 베트남, 북한, 파키스탄, 알제리, 알바니아를 제외한 중국에 우호적인 정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중국은 각국의 정부보다는 세계 ‘인민‘들의 사랑에 의존했지만 인민은 군대나 무역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P167
그 모든 실책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이후 이어진 급속한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물리적인 공장시설과 인적자원을 구축했다. 자국을 현대 세계로 이끌고, 문맹을 근절하고, 만성질환을 퇴치하고, 산업화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한 혁명가들의 공헌을 깎아내리는 것은 비뚤어진 심보이다. 마오쩌둥주의 중국의 차고 넘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경제 호황은 국가적·사회적 해방을 포함한 중국의 성과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경제 분야에서 좀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문화대혁명을 중국의 발전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에야 이전에는 없었던 더 큰 국제적인 기회를 발견했다. 중국과 세계자본주의의 경제적 재통합은 세계자본주의가 중국의 방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할 때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조건은 1960년대 중반의 소규모 세계경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P177
개혁 프로그램이 경제를 아무리 자유화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본주의에게 나라의 문을 활짝 연 순진한 개방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국가가 주도한 모험이었다.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중국의 혁명은 중국이 더 넓은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중국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중국이 돈을 받고 세계자본주의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었으며, 초기 마오쩌둥주의자들이 정치 캠페인을 동원해가며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려고 했던 노력과 매우 비슷하다.- P178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중국이 파산한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구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때 혁명의 배후 지원자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중국이 세계자본주의가 세계에서 안심하고 번성할 수 있게 만드는 중국이 된 것이다.-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