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직전에 마오쩌둥은 문화부가 ‘죽은 미라의 부서‘가 되었다고 불평했다. 중국의 문화유산이라는 죽은 미라는 이제 홍위병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P84
홍위병의 초기 전성기와 더 길었던 통제 및 통합 기간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한다. 후기의 정책은 전통 예술이나 외국 예술의 역할을 제한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작품으로 대체하는 데는 훨씬 덜 성공적이었다.- P85
홍위병들은 혁명의 적으로 의심되는 집을 수색했는데, 베이징의 10만여 가구 이상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급습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시민들이 범죄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일부 소장품들을 선제적으로 파기했다.(중략) 젊은 반군들이 파괴한 국보급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족보, 그림, 서적, 녹음 기록, 종교적 성상(聖像) 등 많은 개인적인 물품들도 영원히 사라졌다.- P86
다수의 홍위병들은 ‘흑오류‘를 습격하는 일에찬성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에 대한 폭력에 혐오감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다. 국가 역시 주요기념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P86
‘사구‘와 함께 그물망에 걸린 것은 1911년부터 1949년 (중화민국) 시기의 수입 서적과 음악 및 중국산 근대식 제품을 포함한 부르주아 예술의 상징물이었다. 소비에트 블록(the Soviet bloc, 구소련 및 친소 동구권)과 관련된 작품은 수정주의로 비난받았다. 처음부터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었던 문화대혁명의 대중 동원 단계는 중국 사회의 얕은 내부에 늘 잠재해 있던 토착주의적(자국문화 중심주의적) 성향을 밖으로 이끌어냈다.- P87
사구 반대운동과 병행하여 혁명 예술 제작 러시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는데, 특히 음악원과 미술원 소속의 홍위병 학생들이 이를 주도했다. 실력보다는 (혁명적) 열정이 더 중요했지만 그래도 독자들을 더 잘 끌어들일 수 있도록 종종 가장 뛰어난 학생 서예가들이 뽑혀 대자보를 작성했다.- P91
1967년 2월이 되자 당 중앙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것을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예술가들은 즉시 자신의 원래의 학교와 일터로 돌아가 노동자, 농민, 군인들을 위한 혁명 예술을 준비해야 했다.- P91
사실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홍위병들이 크게 실망할 만한 문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전통 가극과 옛 소설을 좋아했고, 서예가로서 자신의 평판을 자랑스러워했으며 다른 옛 혁명가들과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중략)
마오쩌둥은 뾰족한 구두나 바이올린 연주에 발끈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제대로 중국 문화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기를 바랐다.- P92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예술의 진작振作)을 자신의 아내인 전직 여배우 장칭에게 맡겼고, 그녀는 일련의 모범극을 조직했다. 장칭은 문화부장이던 위후이융을 비롯해 경험이 많은 가수, 무용수, 작곡가 그룹과 함께 일하면서 일종의 프로듀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작품들은 오케스트라와 발레 등 서양의 요소를 선택적으로 도입하여 예술을 현대화하려는 예전부터의 흐름에 동참한 것이었지만, 다른 점은 오락이 아닌 혁명을 위해서였다.(중략) 장칭은 문화대혁명이 홍위병을 강제 해산시키던 1967년 5월에 전국적으로 8개의 모범극 작품군을 선보였다.- P93
그녀는 홍위병운동이 끝날 무렵 조성된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가장 극단적인 문화민족주의를 막았다. 장칭은 홍위병이 부르주아적이라고 공격한 해외에서 수입된 두 가지 예술 형식, 즉 유화와 피아노 음악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했던 것이다. 장칭은 이 두 가지 형식이 중국 예술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P94
사실 해외에서 들어온 서양 회화와 음악은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서양 예술의 기본 방법과 소재를 혁명을 위해 정화하여 활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 P95
새로운 가극에서 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작품의 내용이었다. 전통 가극은 고대 왕조의 전설에 나오는 도덕적인 이야기를 강조한 반면, 새로운 가극작품들은 혁명시대에서 교훈을 끌어내며 현재를 배경으로 삼았다.- P96
급진주의자들이 혁신을 위해 공연예술을 선택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문학은 권력과 가장 밀접한 예술이었으므로 그들의 적대자들이 더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 분야에서 권력을 잡는 것이 더욱 쉬웠을 뿐만 아니라 장칭은 배우 출신이라는 배경 덕분에 (다른 예술분야라면 그녀가 가지지 못했을) 무대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중국 가극은 문학보다 훨씬 대중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포퓰리즘 개혁에 더 적합했다. 마지막으로 가극은 소설이나 시와는 달리 아마추어 버전이나 영화 버전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택은 문화대혁명의 예술에 즉각적인 활력과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했다.- P96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급진적인 새로운 예술을 요구하면서도 오랜 전통을 일부 활용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원칙이 지고지상의 위치를 차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P97
중국에서는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전통적으로 주를 이룬다. 중국의 예술가들은 유급 선전원이든 정권에 대한 반체제 비평가든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자신의 예술이 당연히 공공생활에 대해 논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98
문화대혁명은 전문 예술가들의 엘리트주의를 경멸하면서 아마추어 숭배를 부추겼다. 급진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 군인들도 예술가와 공연자가 될 수 있고, 그들의 참여가 새로운 혁명 문화를 추동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P98
마오쩌둥주의운동의 아마추어 이상은 예술을 오락적인 즐거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은 그러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P99
문화대혁명은 장식과 복잡함, 수월한 기교를 내세우는 중국 미학에 대해 대부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의 예술은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유희적인 감각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특히 전통 수공예품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P100
마오쩌둥주의 예술은 과거를 이상화하여 보는 중국 전통과 확실히 단절했다. 중국의 관념은 고대 황금시대에서 이상을 찾는다는 점에서, 진보에서 이상을 찾으므로 미래가 (지금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의 관념과 대조적이다. 이 지점에서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중국의 전통을 봉건적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그 무게를 혐오하는 5.4 전통에 동참했다.- P102
마지막으로 문화대혁명 예술이 전통적인 성차별을 거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많은 작품에 강한 여자 주인공들이 눈에 띄게 등장하는데, 이는 여성을 지도자급 위치에 포괄시키려는 문화대혁명의 노력을 강조했다.- P103
예술 개혁은 정치적 통제 시스템이기도 했다. 이 말은 (중략) 사람들이 온 나라가 참여하는 활동에 자신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가질 수 있도록 예술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04
문화에 대한 마오쩌둥주의적 중앙 통제 덕분에 당 중앙은 국가가 실제 보증할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씬 더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인종, 경제, 심지어성별 차이까지 표면적으로 동질화시켰다.(중략) 행정 혼란과 경제 분권화의 결과로 인해 지역마다 특색에 맞게 변형된 문화가 사실상 재등장하고 있었는데, 베이징에서 유입된 시끄럽고 고집스러운 문화가 대중들이 이런 지역 문화에 관심을 쏟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P107
많은 이들이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예술을 포기하기도 했다. 중국의 위대한 두 작가인 첸중수와 선충원은 1949년에 펜을 내려놓았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작품 의뢰를 거부할 수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현실적으로 글이 써지지 않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처신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P113
문화대혁명 이전을 돌이켜보면 문화대혁명은 ‘봉건적‘ 가치의 무거운 짐을 거부하는 급진적 현대화라는 기존의 강력한 ‘5.4의 기획‘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보다 극단적인 5.4 운동가들이 주장한 완전한 서구화도 포기했다. 대신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서구의 기술로 뒷받침되는 중국 민족주의를 배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문화대혁명은 균질화된 문화 관객층을 중국에 탄생시켰다. 이들은 교훈적인 메시지로 연마되었으며, 지역이나 계급 또는 종족성에 주로 호소하는 틈새시장을 배제하도록 형성되었다. 이후 이 관객층은 상업화된 대중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되었고, 현대화라는 기치 아래 기술혁신에 대한 추구가 계속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정치생활에서 지식인의 특권적인 역할을 무너뜨리는 타격을 가했다는 점이다. 이후 시장화라는 쉼없는 망치질은 지식인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P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