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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꽂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가슴저린 말은 혼자 조그맣게 불러보는 '엄마'란 한마디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말 속에 가족과 가정을 위해 일방적으로 사랑과 희생을 쏟아부어야하는 정형화된 존재로서의 엄마를 전제한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면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돼지책>의 가족들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피곳씨네는 내가 자라왔던 가정일 수 있고,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일 수도 있다. 내가 이 그림책에 큰 점수를 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특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를 책임지는 남편과 공부하는 아이들은 모두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 엄마는 온종일 해도해도 별 표시도 없는 일들에 매달려 자신을 잊고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낸다. 각자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집에 와서 당연한 듯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면 엄마는? 엄마의 일터 집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엄마에게 휴식이란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족 모두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아무도 엄마란 존재, 아내란 존재를 배려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돌아왔고 엄마란 존재는 늘 집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아이들이란 모방을 통해 배우고 자라난다. 스폰지처럼 말랑말랑한 아이들의 머리와 가슴은 특히 부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모방하면서 서서히 자신만의 남성상과 여성상의 기초공사를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신문을 펼쳐들고 이것저것 주문을 해대는 피곳씨의 두 아들이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를 불러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기를 키워본 엄마들은 잘 알겠지만 아기들은 호기심이 많아 무엇이든 스스로 해 보려고 한다. 오히려 늘 일만 더 벌이는 격이 되지만 끊임없이 혼자하려고 덤벼든다. 그러던 아기가 어느새 훌쩍 자라 엄마의 도움이 필요없어졌을 때, 이젠 엄마를 도와주어야할 그 아이들은 오히려 무엇이든 엄마를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엄마, 물. 엄마, 내 양말. 아이들이 스스로 하려고 하는 것은 오로지 노는 일 뿐이다. 이렇게 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할 분담을 가르쳐주고 엄마, 아빠가 모범을 보인다면 아이들은 잔소리 없이도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가출해버리는 피곳씨 부인. 엄마의 자리가 휑뎅그레 비어버린 가정은 처음에는 그럭저럭 굴러가는 듯 하나 어느새 남겨진 가족들은 추한 돼지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흔히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운운할 때 돼지는 식탐만 하는 무가치한 존재의 대명사인 것이다. 이 책의 돼지 역시 그런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엄마, 아내란 존재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지켜지던 가정은 엄마, 아내란 자리가 비자마자 돼지 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간혹 <돼지책>을 보고난 남편의 반응을 물어보면 엄마들은 하나 같이 우리 남편은 돼지라도 좋다는데, 한다. 하지만 혹시 남편들은 알고 있을까. 돼지랑 살아야하는 아내의 서글픔을.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슬픔을.

한 권의 책이 소중한 것은 이 세상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쏟아지는 많은 책들 속에서 양서를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라고 해서 낙낙한 것은 아니어서 매번 좋은 책을 선택하기가 힘이 든다. 하지만 <돼지책>은 남아, 여아 구분없이 꼭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의 고충을 부드럽게 이야기한다면 아이들이 먼저 아빠의 손을 잡아 끌지 않을까.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아빠, 우린 돼지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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