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관심은 있지만 잘 모르는 분야인데 『미술의 피부』라는 예측 안되는 제목에 끌리기도 했고 '미술산문집'이라는 점도 부담이 덜했다. 천천히 산책하는 호흡으로 미술의 이곳 저곳을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저자가 전 <월간미술> 편집장이라면 틀림없이 중요한 풍경을 보게 될 테니까. 기대는 적중했지만 예상치 못한 울림이 더 크게 남았다. 그것은 이건수라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여운이었다.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예술의 현실에 대한 사색이자 비판'이 담긴 만큼, 상업화에 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이 보여주는 미술의 풍경은 씁쓸했다. 저자는 지금이 '한국미술의 중세기'일지도 모르겠다며 작가, 감상자, 비평가, 교육, 정책 및 대중매체 등 미술계를 이루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작가에게는 타협 없는 순수함을, 감상자에게는 예리한 안목을, 비평가와 매체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고유한 관점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고, 신진 작가를 지원하는 정책과 대중의 예술화를 이끄는 교육 또한 당부한다. 무엇보다 현 자본주의 체제를 새롭게 의심하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점은 정작 미술계가 읽어야 할 이 책이 무관심 속에 폐기될 것이라는 저자의 확신에 가까운 전망이다. 그럼에도, 허공에 외치는 일이 될 줄 알면서도, 끝내 글을 쓰고 엮어 책으로 내고야 만 저자의 절박함과 집념이 페이지 곳곳에 가득하다. 이는 미술의 흐름을 조망하면서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고,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사랑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미술에 관한 세세한 논의보다 이건수라는 사람 자체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묘한 독후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인생을 던졌던 곳의 바깥으로 밀려나와 그 표면을 쓰다듬어 확인하는 일의 쓸쓸함이 책 제목에서 묻어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문장에 미술계와 무관한 나도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감사해서 우러러보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나와 무관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본질에 가까워지려 애쓰는 것, 타협하지 않고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라면 우리 모두 삶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일 테니까. 결국 예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다른 형식이고, 저자는 당당하고 품격 있는 태도로 이에 답하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는 나는 그 뒤를 부지런히 좇아 갈 일만 남은 것 같다.
예술의 사회성은 아직도 유효하다. 획일화된 지구촌 논리 속에서 자본주의가 궤도에 오르던 초기의 여러 해석을 지금 새롭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마르크스를, 베냐민을, 니체를,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야 한다.
오만한 얘기이지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세계미술의 현장을 가장 많이, 그리고 널리 목격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무런 쓰임을 받지 못하는 잉여인간일 뿐이다. 정치적이지 못한 내 성격과 쓸데없는 것에 대한 관심이 전부인 나의 무능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잉여로 남아 있고 이 허망한 무용자의 시간은 짧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자존심을 굽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자존심은 얼마나 높아질까가 아닌 얼마나 낮아질까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다.
예술이 대중의 삶과 피 속에 녹아 들어가는 것, 예술의 수적이고 외적인 확산이 아닌 질적이고 내적인 잠입이 일어나는 것, 나는 그것을 ‘대중의 예술화‘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의 삶이 예술적으로 계속해서 열려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과 예술이 하나된 경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