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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밤
  • 촛불의 시간
  • 송호근
  • 9,000원 (10%500)
  • 2017-01-17
  • : 98

 2016년 말 한국 정치는 상상도 못했던 실체를 드러내며 무너졌다. 무엇을 생각했든 현실은 까마득히 수준 미달이었고 영화보다 더 허구적이었다. 역대급 규모인 데다 민주국가의 상식선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스캔들이 터지자 좌절과 혼란에 빠진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건 매일 갱신되는 기막힌 뉴스들 뿐- 새롭게 밝혀진 팩트와 의혹, 이를 무위로 만들려는 공작과 기만 등. 정치 이슈에 으레 쏟아지던 분석과 비평은 오히려 길을 잃고 주춤거렸다. 

 그런 점에서 '촛불의 시간'은 지금 꼭 필요한 책이다. 전문가의 관점으로 박근혜 정권의 성격과 과오를 지적하고 현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송호근 교수는 갑갑하고 울화가 치미는 사태에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들을 보면서 '군주의 시간이 끝나고 시민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한다. 바로 그 시민들의 힘으로 한국 정치사 초유의 불행이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한 거름이 될 거라는 통찰은 정치를 다시 시민의 손에 돌려줌으로써 희망과 위안을 건넨다. 물론 시민에게는 권리와 책무가 함께 존재하므로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제대로 된 위안이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필자가 몇 차례 박근혜를 대면했던 경험과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밝혀진 의혹들을 종합해 박근혜의 정치관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그간의 박근혜 정부, 이른바 '군주의 시간'을 비판한 필자의 신문 칼럼들을 모았다.


아버지에 대한 관념, 그것이 반드시 '애증의 관계'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존재하는 공통명제인 '거리 두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박근혜 의원의 시대 읽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였고, 아버지 유업을 완성해야 한다는 장녀가 가진 초조함의 발원지였다. 혹시 여기에 1979년 10.26 이후 청와대를 떠날 때 받았던 수모와 '배신의 정치'에 대한 원한이 숨어 있다면? 귀갓길 심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녀와 세대원의 부정합, 그것이 혹시 그녀와 시대, 그녀와 국민과의 부정합이 된다면 박근혜의 등극은 악몽이 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3부에서는 촛불집회 현상을 분석하며 '시민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전하고, 한국 정치가 '시민민주주의'로 발전하기 위한 요건들을 헤아려본다. 동시에 탄핵 정국을 수습할 방법을 제시하면서 차기 정권에 대한 전망과 대선 주자 평가도 덧붙였다.


뭔가를 해낸 듯한 '착각의 시간'이 지나면 급격한 '추락의 시간'이 온다. 차기 정권은 성장 위기, 금융 위기, 혁신 위기라는 삼각파도를 견뎌내야 한다. 광장에서 권리를 되찾아왔다면, 이제 의무를 수행할 차례다. 탄핵 성취 대가로 얻은 시민자치의 필수덕목은 '손실의 내면화'일 텐데, 우리의 시민성 창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광장에서, 혹은 귀로에서 자문할 일이다.

평화로운 광장집회, 그것을 통한 집단적 의사표출이 시민민주주의의 개화한 형태라면, 광장집회에서 돌아가는 개별 시민들이 어떤 단계를 거쳐 집으로, 그들의 사적공간으로 귀환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개별 시민의 '사적공간'과 '광장' 사이에 어떤 자치조직들이 발전해 있는가를 말이다. (중략) 그렇다면 할 일이 분명해진다. 언론 방송에서 개념화하듯 광장집회가 시민혁명, 촛불혁명이 되려면 결사체적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 맞는 시민활동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회원권을 1개 이상 갖고 있어야 한다. 진정 민주주의적 대의를 살리려면 특정이익을 옹호하는 전문가적 주창단체 외에 전국적, 계급 횡단적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좋다. 환경연합, 경실련, 참여연대, 소비자연합처럼 전국 기반을 갖고 계급을 망라한 조직을 말한다. 그래야 '계급장 떼고' 토론하고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다. 공론의 처소, 공익에 대한 책임의식이 만들어지는 장소다.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정치적 비상사태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촛불집회와 탄핵 정국 이후 '한국 사회'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싶다면, 혼란의 틈새에서도 북극성처럼 작고 단단하게 빛나는 좌표를 찾고 있다면,마침 시의적절하게 나타난 이 책은 힌트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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