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카프카의밤
  • 29쇄
  • 임소라
  • 9,000원 (10%500)
  • 2016-09-09
  • : 121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다 커서 우연히 발견하고 한참을 킥킥거리며 읽었어. 어제와 그저께, 이번 달과 지난 달을 전혀 구별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요즘, 그 초등학생 꼬마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끄적거려놓은 나날은 특별했지. 그때도 별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매일의 순간을 기록한 글에는 어떤 정서들이 분명하게 느껴졌어. 즐거웠다! 슬펐다! 화났다! 무서웠다! 힘들었다! 행복했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재미있었다! 감정들이 꾸밈없어 무척 신선했지. 그 시절 나는 매 순간 생생한 감각 속을 헤엄쳤던 걸까.

 

 어쩌면 일기라는 기록이 지닌 힘인지도 몰라. 늦은 저녁, 학교 숙제였던 일기장을 채우기 위해 하루의 일을 곰곰 떠올린 후 겨우 고른 한 순간을 글로 옮기는 일. 그때 길고 지루한 하루가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면서 쌀이 밥이 되고, 문장이 시가 되듯, 압축된 하루는 '이야기'의 힘을 가지지. 결국 어린 내가 지은 이야기를 다 자란 내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읽는 셈이야.

 

 여기, 모르는 사람도 킥킥 웃게 만드는 남의 일기장이 있어. 마치 내 일상을 보는 듯 평범한 일상인데도 그녀가 중얼중얼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동안 없는 줄 알았던 감정들이 막 꿈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해. 재미있다! 웃긴다! 엉뚱해! 이상해! 슬프다! 쓸쓸하다! 행복하다! 아 역시, 재밌어!! 어느새 책을 보며 킥킥거리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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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모조리 반납한 직후, 나는 서가로 가서 또 책을 골랐다. 결국 읽지 않을 책을 신중히 고르는 일을 2주 간격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알을 못 낳는 닭이라도 된 심정으로 이번엔 어떤 책을 2주간 품어볼까, 하면서 서가를 서성거렸다.   결국 읽지 않을 책을 신중히 고르는 일 章

 

술자리 중간에 다들 내일 뭐하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내일 보일러 고치러 기사님 오신대요, 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E가 그런 기사님들 되게 일찍 오시지 않아? 막 아침 아홉시에 오시는 거 아니야? 라고 해서 다같이 웃었는데 정말 아홉시에 오셨다. 자다 깨서 부랴부랴 앞치마를 맸다. 속옷을 챙겨 입는 것보다 훨씬 빨라서 급하게 문을 열어야 하는 상황마다 애용했다.   오줌 소리 章

 

지금 할 수 있는 운동을 떠올렸다. 유투브에 office yoga를 검색했다. 난 그래도 꽤 유연한 편이니까, 라며 따라한 지 몇 초 만에 우두둑 우두둑 뼈 소리가 났다. 화면 속 그녀는 자꾸 내게 호흡하라고 Breathe and breathe를 연발했지만 나는 자꾸 콧구멍만 커졌다.   장기전을 준비하는 몸부림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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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층이 오포세대로까지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29세(나이 논란은 본문의 '그럼 서른이네' 章을 참고)인 그녀가 살아가는 일은 녹록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날들도 있어. 이쯤에서 책 제목이 '29쇄'인 이유가 그녀의 (아재)개그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눈치챘겠지. 하지만 '29쇄'라는 제목에는 이런 뜻도 담겨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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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찍어도 나라는 판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29판(版)이 아니라 29쇄(刷)다.  

들어가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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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을 직접 손으로 제본하여 만든 정성스러운 독립출판물로 유명한 작가야. 프린터로 원본을 출력할 때마다 조금씩 농도가 달라지는 결과물처럼 자신 또한 거의 변하지 않지만 매 순간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이 책은 그런 매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지. 어쩌면 그런 사소함을 알아차리는 시각, 그리고 그것을 성실하게 기록해나가는 행동이 그녀의 이야기가 일으키는 힘을 설명하는지도 몰라. 이번 책이 한 달 동안의 일기를 엮었다니 좀 더 분발하셔서 다음에는 사계절 두루 엮어주면 좋을 텐데.

난 철저히 내 이야기만 쓰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사람, 여전히 나를 위해서만 쓰는 사람이었다. 내 안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서너 명은 충분히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때마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서 이런 어른이 되었나 눈물이 핑 돌았다. 울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해 우는 사람이었다. 나를 위해서밖에 울지 못하는 사람, 내가 너무 힘든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아플 때마다 번거롭게 우는 일 없이 그럭저럭 견뎌내는, 내 아픔만큼 남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쯤 되면 그럴 거라고 여겼던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쯤 되면 그럴싸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중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서로 무슨 얘길 할까.

"결국 이렇게 된 거야?"
"응,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최선을 다했어?"
"아마도."
"행복해?"
"가끔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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