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가진 행복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
스완의 사랑
몽매한 사랑에 빠져버린 똑똑한 남자, 스완.
언젠가 개츠비를 가리켜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에 빠진 바보' 라고 말했던 h가 떠올랐다.
스완의 상황 역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랑'은 저런 것인 것 같다.
가치가 없어보이는 데에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오직 그것에 집중하는 일. 사랑이 아니고서야 벌일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개츠비와 비교했을 때에 스완은 훨씬 인간적이다. 구체적이고.
초인의 이미지가 스며있는 '상징'으로서의 개츠비와 달리 스완은 인간적인 질투에 휩싸여 쉽게 화를 내고 자아분열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았고,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참 멋지군, 내가 신경증 환자가 되다니." 그러고는 다음 날에도 오데트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 위해 모든걸 다시 시작해야 하고, 그녀를 보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청난 피로가 느껴졌다. 휴식도 변화도 성과도 없는 이런 행동의 필연성이 너무도 잔인하게 느껴져, 어느 날인가는 배에 종기가 난 것을 보고 어쩌면 그 종기가 그의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르며, 자기는 이제 아무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이 병이 임박한 죽음의 순간까지 그를 지배하고 노리개로 삼을 거라고 생각하자 진정한 기쁨이 느껴졌다.
대상을 향해 나의 희망, 권태와 불안 모두를 투사하여
지금껏 단조로웠던 삶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듯한 태도.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때로는 독자인 나의 신경마저 긁어버리기도 하며 인간 감정의 나약함에 대해 한탄하게도 한다.
하지만 나는 삶에는 때로 저런 류의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평범하고 유한한 한 존재로서는 더욱이.
열병이라 하기에도 너무나 집요하고 긴 그 사랑이 잠시 쉬어가는 시기,
스완은 자신의 무의식이 발현된 꿈을 통해 오데트와 상징적으로 이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깨움도 잠시,
그는 다시금 그녀를 향한 온갖 색채의 열망에 다시금 빠져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두 성인 남녀의 지난한 사랑 이야기는 곧 그들의 딸 질베르트와 작품의 어린 화자의 관계로 이어져
독자로 하여금 또 한 번의 달뜬 열병이 다가오리라는 예감을 하게 만든다.
스완에게서 소악절은 여전히 오데트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연결되었다.
그는 이 사랑이 밖의 어떤 것과도 부합하지 않으며, 그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도 자각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또한 그가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이처럼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오데트의 자질에 비추어볼 때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스완의 마음을 오로지 실리적인 지성만이 지배할 때면, 그는 이런 상상의 기쁨 때문에 지적이고 사회적인 이익을 희생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스완이 귀를 기울이자마자 소악절은 그 자체에 필요한 공간을 그의 마음속에 만들어 줄 줄 알았고, 그 때문에 스완 영혼의 균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영혼에 어떤 여백이 쾌락을 위해 마련되었고, 그 쾌락 역시 밖의 어떤 것에도 상응하지 않았지만, 사랑의 쾌락처럼 순전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어서 그에게는 구체적인 사물을 넘어서는 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한편, 앞선 글이 우리의 시각과 후각에 큰 비중을 둔 채 전개 되었다면
이 2권의 비중은 청각 쪽에 보다 쏠려있다.
곡의 악절과 그것을 연주하는 선율에 관한 세밀한 표현들이 글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스완이 감상하는 '음악'과 그의 '사랑'을 엮어내는 묘사는 탁월하다.
그로써 우리는, 스완이 들은 것과 같은 음악을 실제로 들을 수는 없지만, 그런 그를 휘어잡은 '감정'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작품 속에서 프루스트가 거듭 언급하는 뱅퇴유라는 대단한 작곡가의 실존 모델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연구가들마다 제각각 이야기가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몇몇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들의 곡을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 그리고 상상 속에 떠다니는 선율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소리에는-만일 악기를 보면서 그 음을 꾸미는 이미지와 소리를 연결하지만 않는다면-콘트랄토로 노래를 부르는 어떤 목소리와 매우 비슷한 억양이 있어, 마치 한 여자 가수가 연주에 낀 듯한 착각을 준다.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중국 상자처럼 귀중한 바이올린 케이스뿐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사람 마음을 홀리는 세이렌 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것 같다.
때로는 흔들리는 마술 지혜 상자 밑바닥에서, 마치 성수반에 빠진 악마처럼 포로가 된 정령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때로는 한 초자연적인 순수한 존재가 허공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펼치며 지나가는 것 같다.
고장의 이름-이름
하지만 이런 이름들이 그 도시들에 대한 내 이미지를 영원히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만, 그 이미지의 출현을 내 마음속에서 이름 고유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름들은 이미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긴 했지만, 노르망디나 토스카나 지방 같은 도시들을 실제와는 아주 다르게 만들어, 내 상상력이 주는 기쁨은 커졌으나 미래 여행에서 받을 내 실망 역시 더 크게 했다.
이름들은 내가 몇몇 지상의 장소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들을 자극하면서 그 장소들을 보다 특별한 것, 따라서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큰 2부의 마지막은 이후의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다뤄질
언어 자체에의 탐구와 묘사가 맛보기처럼 펼쳐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시각과 청각, 후각 등에 예민하게 반응해온 작가는
이제 자신의 입 안을 굴러다니는 여러 고유명사의 형태를 통해 그에 관한 자기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발화와 동시에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게 떠올라버리는 일상의 사물이 아닌 이름들,
이를테면 사람의 이름이나 도시의 지명 같은 것에서 작가는
은밀하면서도 아름답고 섬세한 그 언어만의 형태를 읽어내는 것이다.
[파르마의 수도원]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가 된 파르마라는 이름은 내게 조밀하고 매끄러우며 보랏빛을 띤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내가 머무를지도 모르는 파르마의 한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게는 조밀하고 매끄럽고 따뜻한 보랏빛 저택에서 지내리라고 생각하는 기쁨이 생겨났다.
글의 말미, 어린 화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알았던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미지에 대한 추억은 어느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
눈부신 광채가 흐르던, 떄로는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거대하게 펼쳐진 세계와 같았던 그의 유년기는 이제 과거로 흘러갔다.
다시금 도시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뒤흔드는 한 소녀로 인해 자기 앞에 새로운 길 하나가 펼쳐졌음을 직감한다.
그는 달콤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노스탤지어를 껴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