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브레 정원의 마로니에 그늘에서 보낸 화창한 일요일 오후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생각할 때면, 그대들은 내 개인적인 삶의 보잘것없는 사건들을 정성스럽게 비워 버리고 대신에 흐르는 물로 적셔진 고장의 낯선 모험과 열망으로 바꾸어 놓았던 그때의 삶을 여전히 환기하고 또 실제로 그 삶을 담고 있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단추 격인 '콩브레'는 화자를 따라 그의 기억과 풍경 속을 자유롭게 산책하듯이 읽어야 하는 글이다.
보통의 실용적인 독서 방식에 따라 또렷한 주제를 찾거나, 그때그때 인상깊은 구절을 맴도는 식으로 읽다 보면
부지불식 간에 글의 리듬을 놓쳐 길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글의 초반 마술적인 환등기의 이야기나 성당 종탑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불러 일으키는 중세를 향한 매혹은
나 이전의 존재, 과거에 두고온 시간을 그리는 노스탤지어 그 자체다.
잠들기 직전 어두운 방의 묘사에서부터 시작해 그런 몇몇 과거의 조각들을 더듬다가
이윽고 그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 맛이 호명하는 콩브레 시절로 뻗어가는 '나'의 회상은
한 시절을 함께했던 인물들은 물론, 그들이 머물던 실내와 그곳에서 바라보던 바깥 풍경, 소리와 냄새,
마을 전체를 둘러싼 시간과 날씨의 변화를 넘나들며 이어진다.
할머니께서는 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셨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날 비웃을지 모르지만, 저 탑이 규정된 미의 기준과는 거리가 있다 해도, 저 오래된 기이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구나. 만일 종탑이 피아노를 친다면 결코 메마른 소리는 내지 않을 거다."
그러고는 종탑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 위해 모은 두 손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경사진 돌들의 그 부드러운 긴장과 열정적인 기울어짐을 두 눈으로 좇으셨는데, 첨탑의 기세와 완전히 하나가 된 할머니의 시선은 첨탑과 더불어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글의 중반 무렵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콩브레 근교 자연의 세세한 묘사를 읽고 있다보면
내가 앉아있는 곳이 어디건 간에 싱그럽게 가득 차오르는 푸른빛을 맛볼 수 있다.
특히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로 언급되는 두 길을 다루는 대목에서 몰입은 정점에 이르는데,
아마도 이게 작가 본인이 독서를 통해 경험했다던 유년 시절의 '꿈과 같은 황홀'일 거라 짐작한다.
작가는 거듭 말한다.
그렇게 정해진 페이지 안에서 소설가가 글로써 펼쳐보이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천천히 늘어지듯 흘러가는 탓에 감정의 알맹이를 놓쳐버리기 십상인 현실 속에서,
우리를 폭발적으로 뒤흔드는 자극제와 같다고 말이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시에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객관적인 요소로 환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 후에도 배운 적이 없었으며, 또는 눈 빛깔에 대한 개념을 추출하기에도 충분한 '관찰력'이 없었으므로,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할 때면 그 눈의 광채에 대한 추억은, 그녀 머리가 금발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명한 하늘빛 광채로 떠올랐다. 따라서 만약 그녀 눈동자가 그토록 검지 않았다면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는- 특히 내가 파란색이라고 생각하며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페이지에 걸쳐 총천연색으로 묘사되는 콩브레 시절은, 유년기에 새긴 강렬한 기억 같은 것이 얼마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막연한 후회와 질투마저 느끼게 할 법 한 수준이다.
더불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빚어지고 다듬어지는 이미지, 언어라는 게
인간 삶의 정신적인 부분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끔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 더 특이할 점이라면 작중 인물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스노비즘.
그리고 부르주아적 삶에 관한 자연스럽고 담담한 묘사들.
화자가 벌이는 거의 모든 회상도 어디까지나 그 세계관 안에서 이뤄지는 느낌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겪어본 것, 할 수 있는 말만 하는 작가구나 싶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만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창조에 대한 믿음이 내 마음속에서 고갈된 탓인지, 아니면 현실이란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서 그런 건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에 보이는 꽃들은 진짜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 라일락, 산사꽃, 수레국화, 개양귀비, 사과나무가 있는 메제글리즈 쪽과, 올챙이가 헤엄치는 냇가와 수련과 금빛 미나리아재비가 있는 게르망트 쪽은 내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고장의 모습이었다.
1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 종탑에 관한 에피소드에 기대어 프루스트는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작가로서의 심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자연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감각의 근원, 인상 그 자체를
스스로가 납득할 수있는 언어로 해석해내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 시달리던 화자는,
자신을 매료시켜온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해 문학적 재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본인의 처지를 한탄한다.
하지만 반복적인 시도, 인상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 끝에 그는 생애 최초의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짧은 글을 적게 된다.
프루스트는 어린 화자의 이런 끈질김, 그리고 그 화자의 언어에 의해 또렷하게 묘사되는 '순간'을 공개함으로써
작가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한 의견 또한 슬쩍 내비춘다.
삼백 페이지 남짓의 '콩브레'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새 다시 '현재'의 방 안으로 돌아온 화자가
어둠을 걷고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는 지점에서 마무리 된다.
그리고 그런 화자와 더불어 마을의 저 적지 않은 공간을 누비고 다니던 독자는
이 다소 급작스런 전환에 놀라며, 흡사 길고 선명한 꿈을 꾸다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버린다.
내가 보기에 사실상 이 긴 소설의 첫번째 장이 가지는 가치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뒤를 따라 내게는 먼 이국의 프랑스 땅과 거리, 숲을 정신없이 헤치고 다니다 어느 순간 휘릭,
다시 그의 침대 그리고 나의 침대로 돌아오게 되는 지점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