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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ulovem
  • 로마의 테라스
  • 파스칼 키냐르
  • 9,000원 (10%500)
  • 2002-11-28
  • : 1,196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매혹적인 하룻밤이 있어. 저녁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잠이 들지.

그들은 마치 어둠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밤 속으로 빠져들어.

그것은 추억이네.


 


속세에서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던 얼굴을 잃고, 뜨겁게 사랑하던 여인마저 잃은 예술가 몸므.


[로마의 테라스]는 탐해서는 안되는 대상을 사랑한 죄로 빛을 잃을 운명, 무채색의 운명으로 밀어 넣어진 

17세기 어느 예술가의 삶을 다룬 이야기이다.


언뜻 개별의 조각들로 봐도 어색하지 않은 챕터 사십여개를 모아놓은 이 작품은 

아주 느슨한 구조의 소설, 에세이, 혹은 (허구의) 전기처럼 읽힌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느슨한 사이사이를 거닐며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신화적이기도 한 몽상에 빠져든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작가 키냐르에 의해 만들어진 이 몸므라는 캐릭터는 2차원적인 평면의 공간에 '달라붙어' 존재하는 에칭과 같은 존재다.
그는 장차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도 걸지 않으며, 이미 지나온 과거에 대한 미련조차 떨쳐버린 사람 같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열망과 바람을 오직 판화 작업 하나에 몰아넣어버린 듯 보이는 그의 이런 태도는대부분의 경우 현재형으로 서술되는 글의 형식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바람과 세월에 닳고, 피로와 기쁨에 탄력을 잃은 살갗, 갖가지 체모, 눈물, 땀방울, 손톱과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마치 낙엽이나 죽은 나뭇가지처럼 땅에 떨어져, 두툼한 살갗 외부로 점점 더 빈번히 빠져나가는 영혼을 흩어지게 하지.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지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몸므는 자신의 늙어가는 육체를 위와 같이 묘사한다. 

풍경(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서서히 그 자연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육신에 관한 매우 시적인 서술이다.   


언젠가는 풍경이 나를 통과할 것이라는 말. 

'죽음'에로의 다분히 관조적이고 또 낭만적이기까지 한 접근이다.  


이와 같은 죽음 혹은 나이듦에 관한 묘사는 

몸므가 평생에 걸쳐 몰두한 동판화의 메조틴트 작법에도 적용이 된다.


판면 전체를 미리 우둘투둘하게 만들어 놓은 뒤, 

그것을 다시 펴고 으깨어가며 새로운 선을 창조해내는 메조틴트는 

결국 '풍경(우둘투둘한 판면)'이 '형상(새로이 만들어지는 선)'에 앞서 존재한다는 선언의 재현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미지적 상징은 몸므 자신의 얼굴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얼굴은 젊은 시절 연적의 공격에 의한 화상으로 흉하게 이그러져 있다. 

이후 몸므의 생은 흡사 그 우둘투둘한 살갗 위로 

여러 겹의 감정과 시간 같은 것을 하나씩 새겨나가는 일과 같았다. 







  25


  분노에 대해 마리가 한 말이다. 

"불행한 사람들은 부모들의 분노, 뒤이은 쾌락도 그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분노의 산물이다."


  분노에 사로 잡히면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말을 듣는다.


  스타기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이 광란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암벽에서 몸을 날린 잠수부가 도중에 낙하를 멈추고 물에 떨어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생 시랑 사제의 말이다.

 "분노는 유채색의 기피를 의미한다. 로마인 모뮈스는 유채색을 거부한 화가였다. 

어둠과 분노는 동일한 단어이다. 신과 복수가 하느님의 유일한 행위를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는 '복수는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콜레khole란 단어가 분노ira가 아니라 검은색noirceur의 의미였다.

고대인이 보기에 우울melancolie에 깃들어 있는 분노란 바로 밤에 깃들어 있는 어둠noir이었다.

어둠은 이 세계를 출생과 죽음 사이로 분리시킨 강렬한 대비를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다고 눈을 가려보아도, 눈을 가린 띠를 두 번 돌려 뒤통수에 묶어보아도 소용이 없다.

'출생과 죽음 사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듯 '성sexualite과 지옥 사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몸므의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내리는 비가 색채들을 무화시킨다."

 

  분노는 관능과 마찬가지로 열광적이며 현기증을 일으킨다.


  물수리와 갈매기들은, '물결이 부딪쳐 마침내 둑을 무너뜨리고, 급기야는 거리로까지 흘러넘치는 대양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편 작가는 시각(색채)과 청각(언어)을 동시에 자극하는 글쓰기의 매력 또한 충분히 보여준다.


특히 위에 인용한 챕터 25는 감탄에 감탄이 더해지는 페이지였다.  

분노와 추락, 생과 어둠 같은 단어들 사이를 유려하게 오가며 길어내는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신화 속 어느 용감하지만 가련한 운명을 지닌 주인공처럼 몸므는 

어긋난 사랑, 하나 뿐인 아들과의 불행한 조우 등을 거치며 세상에 자신의 족적을 남긴다. 


작가 키냐르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좇는 과묵한 기록자와 같은 태도로 

그런 몸므의 캐릭터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네.




글의 서두에 적었던 것과 같이 [로마의 테라스]는 탐해서는 안되었던, 

바꿔 말하면 애초에 다다를 수 없던 대상을 추구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키냐르의 전작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 다룬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의 언어'라는 테마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도 같다. 


쉬이 가 닿을 수 없는 근원을 향한 추구로서의 작업을 '시'로 설정했던 전작과 달리 

[로마의 테라스]에서는 '판화'라는 작업이 다루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와 같은 소재의 차이로 말미암아 두 작품은 여러 부분에 걸쳐 각기 서로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1652년 그륀하겐이 전하는 몸므의 말이다. 

"판화가를 번역자로 간주해야 한다. 

번역자는 풍요롭고 멋진 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사실은 그만 못 하지만 더 강렬한 다른 언어로 바꿔놓는다.

그 강렬함은 그것과 대면하는 자를 즉시 침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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