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동양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
정지우
고전에 대한 관심은 묘할 정도로 시대마다 이어진다. 고전교양 인문학 열풍이 불어 출판 시장을 휩쓰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고전 원전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늘어 원전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도 한다. 대학의 인문학 관련 전공들은사라지고, 대학원생을 구하기도 어렵다고 할 정도로 위기라곤 하지만, 사람들은 잊을 만하면 ‘고전‘을 찾는다. 특히, 유가, 노장, 불가 등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은 돌고 돌듯이 우리 곁을 찾아온다.
최근에는 AI가 전 세계를 휩쓸어 삼키면서, 인간
의 노동, 창작, 사회적 역할 등을 모두 대체할 거라는 공포가 가득하다. AI의 학습, 연구, 창작 능력도 가공할 정도여서 과연 종래의 인문학 연구 같은 것이 얼마나 유효한가에 대한논의도 치열하다. 당장 기존 인문학 관련 논문들을 AI에게학습시킨 후 새로운 연구 주제를 요청하면, AI는 하루종일 수천 개의 아이디어도 생성해 낼 수 있다. 연구자들이AI 활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되지못한다.
그런 와중에 다시금 도돌이표처럼 ‘고전‘에 대한 관심을가진다 할지라도, 고전을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않을 수 없다. 가령, 『논어』를 읽는다는 건 ‘공자님 말씀‘을- P101
암기하고 지식을 쌓는다는 뜻일까? 챗GPT에게 물어보면 공자의 이야기쯤은 금방 요약할 텐데, 그것이 큰 의미가있을까? ‘공자님 말씀‘을 우리가 잘 안다고 해서 앞으로의 거친 미래에 도움이 될까? 이런 의문들을 마주하지 않을 수없다.
그럼에도 고백하자면, 나는 거의 매일 고전을 읽는다. 마음이 약간 허하다 싶으면 곧장 홍자성의 『채근담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상록』을 집어 든다. 가끔은 성경도 들춰 본다. 마음 깊이 내려가고 싶을 때는 카뮈나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 서양철학자인 니체나 라캉의 책은 거의 매년 새로운 마음으로 읽고 있다. 그 이유는 고전의 한 줄 한 줄에 챗GPT와의 채팅에서보다 더 유용하거나 많은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의 한 줄, 한 단어 속에 시대를 넘어선 어느 한인간과의 진실한 ‘대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우리 시대에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시대 한 인간과의 진실한 대화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심지어 그 ‘인간‘은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히고 또 읽히며, ‘대화할 만한‘ 가치가있다고 검증된 이들이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오랜 세월의 무게에 담긴 신뢰 덕분에, 더 진지하고 깊이있게 모든 단어와 문장을 대하게 된다. 나아가 그 무게감이- P102
역으로 내 삶에 들어와 나를 바라본다. 챗GPT의 수많은 문장들보다도 고전의 ‘한 단어‘가 나를 뒤흔들며 내게 가하는 힘이 더 강력하다. 이 강력함을 느끼고자, 나는 고전을찾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나 자신이 고전에 부여하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야기여도, 고전이 아니라 지하철 화장실에 써 붙인 문구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무게감 없이다가온다. 그러나 내가 고전에 그만한 무게감을 부여하고있기 때문에, 역으로 고전은 의미심장한 무게감으로 내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는다. 즉, ‘고전‘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밤을 지키면서, 그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고, 때론 누군가에게는 인생 전체를 걸고 고민한 성찰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고전은 우리에게 진짜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고전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을 대하는 태도‘다. 고전 속에 틀림없이 우리 삶에 의미 있을만한 통찰이 있다고 믿고 고전을 대하는 것, 그래서 그 고전을 기준으로 다시 우리 삶을 돌아보며 재구성하는 일이야말로 고전 읽기의 기본 자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논어』나 『맹자』 원전을 집어 든다고해서, 곧바로 그런 태도가 장착되어 고전의 고유한 의미와 무게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단언하긴 어렵다. 오히려 고전을- P103
대하는 그러한 태도를 만들어 가는 데 일정한 안내자가 필요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그 안내자가 있다. 바로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부제로 내놓은 신영복 교수의「강의」다.
신영복 교수는 『강의』에서 자신의 ‘고전 독법‘에 대해 명료한 관점을 제시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는 ‘관계론‘이라는 화두에 따라 『주역』, 『논어』, 『맹자』, 노장, 묵자, 순자, 법가등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고전들을 읽어 내겠다고 밝힌다. 이는 막스 베버 이후 서양의 사고관에 익숙해진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체계를 다시 돌아보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강의』, 36쪽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읽다 보면, 확실히 고전이 고전에만 머물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동양고전들에 대한 단순한 이해를 돕는 걸 넘어서, 끊임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삶을 묻게 한다. 특히, 어느덧- P104
부인할 수 없는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삶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한번 그의 길 안내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 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앞의 책, 88쪽
『강의』를 집어 들기 전까지만 해도, 『주역』만큼은 내 관심 밖이었다. 책에서 말하듯 『주역』은 어디까지나 점치는 책이고, 아무래도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게 ‘현대인‘인 나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사주팔자나 점성술 등이 유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것들을 진지하게 믿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책을 제쳐 두고 『주역』을 읽고 공부하는데 관심이 가긴 어려웠다. 그러나 강의』에 등장한 다음 구절을 읽자마자, 내 생각에 균열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P105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앞의 책, 89쪽
점치는 걸 단순히 미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우주에 대해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겸허함‘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지적하자, 그 이야기에 곧바로 공감이 갔다. 그는 인간 마음에 공통된 어떤 ‘약함‘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모든 걸‘ 안다는 자만에 빠지기도 했다가, 그 속에서후회하고 다시 불안에 떨기도 한다. 사실, ‘점‘을 친다는 건 그 자체로 내가 현재나 미래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는겸손을 전제에 두고 있다. 타인이 찾아낸 어떤 원리에 경의를 표하고 그에 따라 보겠다는 의지가 있다. 즉,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타자에게 기대어 보겠다는 마음의 표현일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강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처음부터 ‘자기중심성‘의 세계관을 집요하게 경계하면서, 우리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재가 내 안에 먼저 바로 서야 함을 강조한다.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P106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다른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책, 42쪽
이러한 이야기는 듣기 좋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 같은것이어서, 어쩐지 우리 시대에는 ‘귓등‘으로 들릴 것만 같다. 그러나 『강의』를 따라 동양고전의 세계로 젖어 들수록,
그것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각자도생‘하며 자기만의 안위와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시대에, 과연 우리 삶을 보다
‘살리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을 생각하며 관계에서의조화를 찾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영복 교수가 『주역』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관계의 기술‘은 뭘까? 그것은 ‘절제와 겸손‘이다.
『주역』에서는 ..."항룡유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P107
있습니다.-앞의 책, 131쪽
우리는 대체로 ‘나‘를 중심으로 한 관계를 생각한다. 상대가 내게 이익을 주는가, 필요가 있는가, 나의 성공에도움을 주는가, 같은 생각으로 관계를 따지고 배치한다. 그렇게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상대의 쓸모를 고민하며 관계를 맺는다. 상대가 ‘나로 인해‘ 어떤 도움을 얻는지, 내가 상대에게 주는 것은 오히려 ‘희생‘이라 생각하여 마이너스(-)적인 면으로 본다.
그러나 신영복 교수는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볼 게아니라, ‘상대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의 존재란 결국 타인들과의 관계망 속에 위치해 있는 하나의 점이다. 그 전체적인 면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나의 존재가 ‘적절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나 혼자만 도드라져 보인다고 좋은 게 아니다. 나 혼자 하늘 끝까지 오르면 결국 후회한다. 오히려 주변인들과의 조화 속에서 잘어우러져 있어야 하는 게 ‘관계‘를 고려할 줄 아는 태도인것이다. 영화로 친다면, 주연 배우 하나만 튀어서는 곤란하고 조연 배우들과의 적절한 조화가 중요하다고 보는 셈이다.
그런 조화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게 감독의 역할이라는점에서, 우리 스스로 인생과 관계에서의 ‘감독‘이 될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P108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제대로 배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창 시절에는 다른 친구들과의 조화보다 일단 공부 열심히 해서 1등 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후에도 취업에서든 면접에서든 다른 이들과의 조화보다는 나 혼자 도드라져서 1등 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러다가 회사에 들어가고 나면, 비로소 동료 관계나 팀에서의 역할 등이 중요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회사 내에서 조차 각자도생이 흔해지고 있으며, 다른이들을 누르고 혼자 정치와 실적을 통해 ‘승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많다. 그 속에서 결국 관계의 조화는 이루지 못하고, 서로를 ‘자기중심적‘으로만 대하는 문화가 확산되기도 한다.
신영복 교수는 그런 점에서 동양의 고전들을 ‘관계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고전 독법‘에 대한 하나의 전범을 본다. 그의그 집요한 시도는 결국 고전이 그의 삶에, 그리고 그의 글을 읽는 독자에게, 나아가 그와 독자가 형성하고 있는 한 사회와 문화에까지 어떠한 ‘무게‘로 전달된다. ‘나‘ 중심으로 모든걸 사고하고 만들어 가고 있는 이 인생과 사회 전체에 하나의 무게 있는 관점이 던져지는 것이다.- P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