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 상대가 경계를 넘도록 허용해놓고서 나는 절망했다. 왜 미안해하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뻔뻔해? 어떻게 이렇게 나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어? 그 절망감은 내 마음을 부식시켰지만 나는 그 감정마저도 억압하여 드러내지 않으려고애썼다. 경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모든 관계가 결국에는 같은 방식으로 어그러질까봐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기가 힘들어졌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끼던 문제였지만 가까웠던 사람과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깨진 후에야 나는 내 패턴을 대면하게 됐다. 경계를 흐리고 상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나, 경계를 침해당하고 분노하는 나, 그 분노를 다시금 마음 깊숙이 억압하는 나.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나는 나의 억압된 분노가 스스로를 아프게 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싫은 소리 한번하지 못해서,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서 네가 너에게 한 짓을 봐봐...... 결국 네 몸이 너에게 말한 거야. 척하면서 사는거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이타적인 척 좀 그만하라고. 네가 얼마나 훼손되고 화나고 절망했는지 인정하라고.- P122
"불확실성보다는 죄책감이 더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진단을 받고 나는 내가 병에 걸린 이유를 생각해봤다. 몇 달간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먼저 떠올랐다. 이어서 몇 년 전에 받은 충격도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분노를 참고 억눌러야만 미래의 내가 안전할 수 있으리라판단했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건강한 선택이었을까. 소화할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삼키는 건 스스로에게 너무강압적이고 잔인한 일 아니었나.
내 생활 습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는 고민이 있으면 잠으로 도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길게 자곤 했다. 음주도 안 좋은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했다. 삼 년 전에 완전히 단주하긴 했지만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던 시간이 길었다. 나는 이어서 생각했다. ‘술을 끊어서 다행이다. 아직도 마시고 있었다면 떳떳하지 못했을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 ‘뭐가 떳떳하지 못했을 거란 거야? 너는 네가 죄를 지어서 병에걸렸다고 생각해?‘
‘아마도.‘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잘못 살아서,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해서, 죄를 지어서 이런 결과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아서 프랭크의 말대로 그런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이 ‘불확실성‘ 속에 빠지는 것보다는 더 편안하- P124
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병의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미래의 불확실성을 양팔 벌려 맞아들이는 일과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암이전신 질환이며, 몸의 다른 곳에서 다시 발병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갑상선암에 걸렸다고 해서 다른암에 더 잘 걸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연구 결과를 읽으면서도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200언제쯤 삶은 결코 통제할 수 없으며 삶의 사건들은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제쯤 모든 규칙을 깨고 펼쳐지는 삶의 불규칙성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연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