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당장이라도 책상 앞으로 달려가서 글을 쓰고 싶었다. 조금 더 깊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써보고 싶었다. 가끔은 한밤중에 잠이 깨서 완전히 각성한 채로 소설쓰기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생각이 났다.
그때 왜 그렇게까지 소설 생각에 몰두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 눌러왔던 깊은 욕구가 내 의식에서 인정받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걸까. 첫 책의 작가의 말에 쓴 대로 이 일을 포기한다는 생각만으로 울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는 그 상태를 설명할 언어가 없을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래도 소설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설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점차 손이 풀렸다. 내 관념 속 ‘멋진‘ 문장을 포기하고 나만의 문체로 글을 썼다. 문체는 내면의 고유한 리듬이었다. 나는 나의 리듬을 존중하고자 했다. ‘주제‘나
‘의미‘ 같은 관념도 버렸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매일 글을 쓴지 이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때 나는 경장편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고지 기준 이백오십 매 정도를 썼을 때 갑자기 어떤문장이 나를 찾아왔다.- P35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나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내가 쓰고 있는 소설 바깥에 있다는 걸 알았다. 해변에 앉아서 모래에 손을 넣고 밤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그 사람은 밤의 해변에서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기존에 쓴 이백오십 매의 글을 버리고 갑자기 찾아온 낯선 목소리를 따라갔다. 마치 스크린을 보듯 눈앞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고, 다시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노력해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저절로 그렇게 됐다. 그 소설을 쓰면서 나는 쓰는 기쁨을 깊이 느꼈다.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작품에 온전히 접속할 수 있었다. 나는 내 고유의 색깔을 고치거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써나갔다. 마치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소설을 썼다. 막히는 부분이 없었고 그저 보이는 대로쓰기만 하면 됐는데,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소설 「쇼코의 미소」를 가장 가까운 공모전에 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P36
 밝은 밤」은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면서 붙잡은 통나무같은 것이었다. 나는 원고를 붙잡고 삶의 물살에 몸을 맡겼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다면 언젠가는 뭍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밝은 밤의 마지막 문장을 썼던 밤이 떠오른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침대에 누워 콧물을 훌쩍거리며 나는 그전에는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어떤 두려움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어떤 인정을 받았을 때조차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 그 글에 대한 보상은 글을썼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넘치게 받은 느낌이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가 어떤 평가를 받든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 글이완벽하지 않아도, 나름의 결점이 있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않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온 마음으로 글을 썼다는 걸 내가 알았으니까. 그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P42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