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에게 희망이나 사랑을 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해 지우는 자신에게 겨우 ‘할일‘을 줬다. 그중 하나가 연필 가루 위에 연필 가루를 얹는 일, 선 위에 또다른 선을 보태는 일이었다. 지우는 그걸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다.- P8
소리가 세번째로 손에 문제를 느낀 건 도내 사생대회에서였다. 중학교 미술부 친구들과 함께 S시의 유서 깊은 성곽에서 열린 문화제에 참가한 소리는 ‘우리 동네‘를 주제로 수채화를 그려 장려상을 받았다. 시상식은 성곽 내 야외무대에서 치러졌고, 시상은 S시를 대표하는 원로 화가가 맡았다.
소리는 무대에서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상장과 꽃다발을 받았다. 그런데 원로 화가와 악수한 순간 눈앞이 뿌예지는 걸느꼈다. 몇 달 전 보리의 앞발을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위 풍경은 그대로인데 오직 그 화가만 흐리게 보였다. 사방에서 사진기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쏟아지는 가운데 소리는정면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내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에 경험한 것처럼자신의 눈이 아니라 손이 무언가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P95
그러고 나서 소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거였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특히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부모님을 멀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춘기를 핑계로 아빠와는 어떻게든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엄마의 스킨십을 매번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이때부터 소리는 가능한 한 손에 뭔가 쥐고 있으려 했다. 이를테면 목탄이나 연필, 붓, 전자 펜 같은 걸. 그러면 집중에 방해가 될까봐 부모님과 친구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소리는 누군가와 손잡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학교에서 결벽증과 강박증이 있는 아이로 소문났다. 엄마를 닮아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던 소리는 점점 말수 적고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갔다.- P97
둥글고 무분별한 포옹이 아닌 절제된 직각의 수용. 그렇다고 지우가 그림에 대해 엄청난 환상이있거나 기대를 품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두달 전 엄마 장례를 마치고 학교에 갔을 때도 그랬다. 지우는 방과후 청소를 하다 미술 선생님 책상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아동‘이니 ‘치료‘니 하는 말이 적힌 학술 도서였다. 지우는 별생각 없이 그 책의 책장을 스르륵 넘겼다. 그러곤 익명의 아동들이 그린 어둡고 기이한 그림을 보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췄다.
미술은 자기 정화 효과가 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주지만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지우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 문장을 한번 더 훑었다.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다‘는 말, 믿을 만한 말이라 생각했다.- P119
쉬는 시간이 끝나 두 사람이 공사 현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쪽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었다. 곧이어 어른들의 웅성거림과 더불어 팀장님의 고함과 알 수 없는 여러 소리들이 칼바람에 실려왔다. 지우는 놀란 얼굴로 현장에 달려갔다. 진구 형이 대형 쇠기둥 아래 깔린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골이 깊게 파인 바닥에 핏물이 흥건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진구 형을 빼내주고 싶었는데 지우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느새 진한 피비린내가 났다. 옆에 있던 팀장님이 "야 인마! 정신 차려!"
라며 어깨를 치는 바람에 지우는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가 부지불식간에 비명을 지르는 그런 현실로. 진짜 세계로.- P126
소리가 휴대전화 액정 위로 두 손가락을 벌려 엄마 얼굴을 확대했다. 긴 투병 기간 동안 엄마 몸은 계속 달라졌다. 장기는 물론이고 몸의 전체적인 선과 색이 변해갔다. 평소 엄마 모습을 많이 그려온 소리는 그걸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픈 엄마를 그리다 말고 종종 손을 멈췄다. 소리는 엄마가 떠난 뒤에도 엄마 얼굴을 자주 그렸다. 엄마의 눈동자에 고인 빛을 표현할 땐 더 공을 들였고, 어깨선을 다듬을 땐 실제로 엄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했다. 그렇게 한때 엄마였거나 여전히 엄마인 선들을 좇으며 손끝으로 엄마를 만졌다. 그런 식으로 엄마를 한번 더 가졌다.
‘지우도 그랬을까?‘- P129
방법은 간단했다. 지금껏 지우 시점으로 올라온 <용식 일기>를 용식 시점으로 바꿔 그리는 거였다. 이를테면 그림 전면에 용식의 뒤통수를 그리고 용식의 시선으로 본 지우 모습을 묘사하는 식으로, 진지한 얼굴로 먹이를고르는 지우의 옆얼굴이라든지 멀리서 연필을 쥔 채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 등을 그리면 어떨까 싶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잠든 지우의 실루엣이나 그림 속에 전부 드러나 있진 않지만 어느 밤 분명 존재했을 어떤 슬픔과 고독까지도. 소리 생각에 용식을 의인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용식은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거기 그냥 있으면 됐다. 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렇게 그저 시점이 바뀐 것만으로 지우가 무언가 알아챘음 싶었다. 비록 그게 지우가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거라 해도.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P132
내가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까? 나는 이걸 부치고 싶을까? 모르겠어.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채운아. 그게 설사 너와 같은 지옥에있던 상대라 해도,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뽕뽕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미안하다.- P182
정류소 너머로 어둠 속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 현장의 실루엣이 보였다. 허공으로 불쑥 솟은 여러 개의 골리앗 크레인이 오늘따라 더 웅장하고 황량해 보였다. 지우는 현장에서 일하며 자신도 그런 수많은 기계 부품 중 하나라고 느꼈다. 수많은 인부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안전모를 쓰고 있어 더 그랬다. 그럼에도 그 압도적인 허무를 견딜 수있었던 건 모두 용식 덕분이었다. ‘내게는 책임져야 할 존재가 있다‘는,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지우를 버티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져 지우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저 온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오면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