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락
남한군이 북한군을 처음으로 전멸시킨 곳이라 했다 운동장엔 북한군이 바글바글했고 장갑차와 야포들이 노상을 가득 메웠다고 했다 한여름 몇백년은 산 것 같은 나무 아래서 어둠이 깔리기 전 총성이 한발 울려 퍼졌다고 했다 이어지는 소총 세례 집중사격, 옷을 벗어둔 채 단잠에 빠진 북한군은 속수무책이었다고 했다 피로 운동장이 물들고 시체들이 한가득이었다고 했다 쏘고 또 쏘고 적이 섬멸될 때까지 몇백년은 산 것 같은 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값지고 값진 최초의 승리였다고 했다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도 운동장이 계속되었다 할아버지 이제 집으로가요, 아무리 붙잡고 흔들어도 할아버지는 좀처럼 움직이지않았다 전승비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한여름 밤 몇백년은 산 것 같은 신비로운 나무 아래서의 일이었다 그 덕택에 지금 네가 거기에서 흩날리고 있는 게야, 눈을 뜨면 피 묻은 초록 잎사귀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수업 시작을 알리는종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이 실내화를 탈탈 털며 내 머리맡을 스쳐갔다 할아버지 혹시 사람을 죽여본 적 있어요? 묻지 못했다- P-1
층간소음
이사 온 날 윗집 사람은 문을 두드렸다 아이가 셋이에요 이해해주세요
둘은 쌍둥이, 한 아이는 이제 막 돌이 지났다 물을 데운다 나는 기다린다 아이가 학원에 가거나 울다 지쳐서 곤히 잠드는 시간을 드륵드륵
분쇄기에 커피 원두를 가는데 벨이 울린다 아랫집이다 얼마전 큰 수술을 했다는 여자는 수시로 벨을 누른다 앙상하다
조용히 좀 해주세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더는 안 돼요 이러시면 전 집에서 걷지도 말아야 해요
문을 걸어 잠근다 여자가 운다 소리가 벽을 타고 넘친다 엉망진창, 머리가 다 울리는데 물은 끓어 넘치지 않는다 언제나 절정에서 불이 나가버리는 포트처럼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친다 스트레치카, 주인공은 벌거벗겨- P-1
진 채 병원 시체 처리 욕실에서 필사적으로 호흡한다 운반꾼이 죽은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빈자리가 부족하다 그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고
아주 잠시 주인공이 호흡을 포기했을 때
공사가 시작된다 다 뜯어고쳐야 해요, 건물주 대신 모자를 눌러쓴 업자가 동의서를 받아 갔다 그래야 더 비싼 값에 집을 팔 수 있다
계단이 울린다 바깥에서 안으로 인부들이 골조를 실어 나른다 녹슨 걸쇠, 창문을 열면 더 많은 집들이 보인다 귀를 찢듯 앰뷸런스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크게 숨을 들이쉰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멈추고 나는 최대한으로, 발걸음을 죽인다- P-1
무기력
요즘 나는 바싹 마른 잎 같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루 세번 약을 먹고 개와 산책한다
혼자에 가까워지고, 주기적으로 볕을 쬐는 일은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믿으며
공원에 도착한다
체조는 허파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믿는다 아무런 의심 없이
땅에 박혀 있는 벤치와 그 앞에 세워진, 적을 몰살한 전쟁영웅의 동상을 믿는다 그것이 가져다준 평화를
한번도 깨진 적 없는 눈동자
무너질 듯, 넘어질 듯 자전거 핸들을 꺾는 아이의 등 뒤로
더는 날아가지 않은 비둘기
빛으로부터- P-1
동공이 시야를 열고 닫듯
울타리는 잔디를 계속해서 보호할 것이다
가두는 분수대를 뛰어내리는 물방울
물방울들
너무 가까이 가진 않는다-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