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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그 겨울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을 읽고


눈 속에서도 매화나무는
몇 구절 꽃줄기를 지켰습니다
서너차례 폭설에도 한번의 강풍에도
꺾이지 않고 눈보다 더 환했습니다

이 세상 무엇이
저렇게 눈부실까요

폭설의 한가운데 서서
매화를 보는 나의 눈빛이
오늘이 끝날인 것처럼 간절하였습니다

한그루 고결을 지키듯
매화나무 질긴 꽃들이
서너평 좁은 마음을 흰 자락으로 덮었을 때

기적처럼 나의 맹목은
끝이 났습니다- P-1
아름다운 진보


산골로 피서 갔던 한 도시 소녀가
밤하늘에 가득 찬
별을 보고 울었다

스스로 빛나는 별자리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밤하늘이 울부짖었다

별빛 안에는 수많은 빛이 있어
아름다움은 빛과 같은 것일까

소녀는 저를 뒤집는 힘으로
별자리 하나를 가졌다- P-1
아침에 생각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지막으로 돈! 천국 외에는 다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문 배달 소년의 응모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생각난다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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