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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그냥 가기 뭐하니까


신경림 시인이 세상을 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조문을갔습니다

화환이 즐비하고 문상객이 북적여서 작별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글쟁이들과 밥 먹고 술 먼저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어 막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다음 날 부조는커녕 빈소에는 들르지도 않은 걸 알았습니다

이 일을 아는 이에게 말했더니 그 양반이 그래도 그냥 가기 뭐하니까 시 한편을 주고 간 거라고 했습니다- P-1
화진(花津)


절집 마당에서 헤어졌지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버지는 아직 거기 계시는지
산그림자 화진 깊이 영가를 밀어 보내며
나는 철없이 울기만 했지
무릎이 아프도록 절만 했지
부모에게 가엾지 않은 자식이 어딨겠어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라고
어느 해 봄 다시 그곳에 갔을 때
무당집처럼 요란한 법당에서
부처님도 울고 계시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 죄짓지 않은 자식이 없는 것처럼
세상에 아프지 않은 부처가 어딨겠어
그러나 부처에겐 부처의 일이 있고
중생에겐 중생의 일이 있어
살자고만 하면 무엇이 섧겠냐며
절 마당을 돌다 내려오는데
강마을이 그때처럼
화진에 잠기고 있었다-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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