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꽃을 든다*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알 수 없어서 꽃을 들지 못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향을 피우지 않았다
누가 당신의 이름을 가렸는지
무엇이 왜 당신의 얼굴을 숨겼는지
누가 애도의 이름으로 애도를 막았는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면
당신의 당신들을 만나 온통 미래였던
당신의 삶과 꿈을 나눌 수 있었다면
우리 애도의 시간은 깊고 넓고 높았으리라
이제야 꽃 놓을 자리를 찾았으니
우리의 분노는 쉽게 시들지 않아야 한다
이제야 향 하나 피워 올릴 시간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각오는 쉽게 불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초혼(招魂)이 천지사방으로 울려 퍼져야 한다- P-1
삶이 달라져야 죽음도 달라지거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지금 여기와 다른 우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진정 애도다
애도를 기도로, 분노를 창조적 실천으로
들어 올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애도다
부디 잘 가시라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꽃을 든다
부디 잘 사시라
당신의 당신들을 위해 꽃을 든다
부디 잘 살아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물려줘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해 꽃을 든다
* 2022년 11월 14일, 시민언론 ‘민들레‘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처음으로 공개할 때 함께 실은 시다.- P-1
선물
‘시인은 달력이 필요하다‘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스승께서
인상파 달력을 건네며 위와 같이 쓰셨다
필요 없던 것이 갑자기 필요해졌다
그날 이후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
포장지나 봉투에 한 줄씩 써 넣곤 했다
은희는 만년필이 필요하다
원택이는 10만 원이 필요하다
택배 기사님은 아이스커피가 필요하다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곤 한다.
필요 없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일
마음을 담아 선물할 때만 가능한 일
내가 필요로 하지 않아
오래 연락하지 않은 석이 현이 순이 훈이
잠 안오는 이 밤 무엇이 필요할지- P-1
바람개비
바람이 없어도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있다
바람이 없으면
달려 나가는 바람개비
바람이 없어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바람개비
오직 자기 힘으로
없는 바람을 만들어내는
없는 바람에게 바람을 보여주는
천지간 바람이 없어서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개비가 있다-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