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초승달 뜨면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보기
초승달 비어 있는 곳
초승달 어두운 곳
눈으로 잇대어
동그라미 그려주기
갓 나온 초사흘 달
땅 위에서 보름달 만들어주기- P-1
고통이 말해주지 않는 고통
고통이 말해주지 않는 고통이 있다
나무가 다 보여주지 않는 나무가 있듯이
내게도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당신이 있다
상처가 다 말하지 않는 상처가
그래서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꽃이 다 보여주지 않는 꽃 어딘가에
꽃의 꽃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다 보여주지 못하는 내가 있듯이
당신이 내게 다 말하지 못하는 당신이 있듯이
이별에게도 이별하지 못하는 이별이 분명 있겠다
만남에게도 만나지 못하는 만남이 분명 있겠다- P-1
묘비명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를 바랐다
돌아보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야 했다
다시 돌아보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야 했다
이렇게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다 살아 있을 때
다시 태어나 제대로 죽어야 했다- P-1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참 많이 변했습니다.
올봄에도 다들 보셨겠지만 꽃 피는 모양새가 예전 같지않습니다. 우리 어릴 적에는 꽃들이 순서대로 피었습니다. 제 온기로 눈을 녹여 피어나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가 피어나면 목련과 벚꽃이 기지개를 켜고 이어 영산홍과 철쭉이 만개했습니다. 그리고 라일락, 그것도 여학교 울타리에 피어나던 라일락 꽃향기라니요. 파란 잉크 자국이 지워지지 않던 반팔 하복 상의가생각납니다.
요즘 봄꽃들은 무슨 시위를 하듯이 한꺼번에 피어납니다.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습니다. 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전에는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 향기를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우리 몸에 스마트폰이 장착(탑재)된 이후 꽃이 멀어졌습니다. 꽃이 피사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꽃을 보면 사진부더 찍습니다. 문제는 찍고(저장하고) 그만이라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전송하고는 그만입니다.- P-1
꽃이 지고 나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꽃이 지면 우리는 꽃나무를 잊어버립니다. 신록으로, 녹음으로 돌아가 여름을 맞이하는 ‘열매의 시간‘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꽃진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낙화가 ‘아픈 성년식‘이겠구나. 그렇습니다. 꽃이 져야 여름입니다. "꽃이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라는 시의 한 구절은 그래서단순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각오이기도 합니다. ‘너‘가 지금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를 떠올리는 ‘나‘의 "꽃 지는 저녁"은 배가 고파야 합니다. 허기를 채워야 다음 날 거뜬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입니다.
4월 16일입니다.
꽃이 져도 누군가를 잊은 적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화 한 통 없어도‘ 꽃 진 자리에서 더 나은 내일을 그리며 늦은 저녁상을 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신문 연재 지면(『농민신문 ‘시인의 읽기‘)에 발표한 글을 옮겼다. 제목은 정호승 시 「꽃 지는 저녁」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의 한 구절을 차용했다.-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