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4.3의 아침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서늘하다

간밤 공방과 안채를 오가며 내가 내놓았던 발자국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눈을 뚫고 가려면 처음부터 다시 길을 내야 했다. 눈에 묻혀 자루 끝만 보이는 삽을 꺼내 털다 말고 나는 멈췄다. 살아오면서 보았던 눈송이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손등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P185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빛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져 나는 손을 털었다. 흠뻑 젖은 손바닥을 코트 앞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삽시간에 딱딱해진 손을 남은 손에 비볐다. 열기가 지펴지지 않았다. 몸속 온기가 손을 통해 빠져나간 듯 가슴이 떨려왔다.- P186
가물거리는 촛불의 음영 때문에, 인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지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뿐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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