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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금강전도>에서 완성된 겸재 화풍의 중요한 특징은 대담한 구도의 변형과 필묵의 농담 대비로 요약될 수 있다. 이제까지 그의 금강산 그림이 기본적으로 대상의 충실한 묘사에 있었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실(寫實)에서사의(寫)로 대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겸재 진경산수의 가장 큰매력이며 미학이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화가의 주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의사상과 시정이 화면 속에 충일된다. 겸재에게 『주역(周易)』을 배운 금석 박준원이 "겸재는 『주역』을 좋아하여 자못 역리(易理)를 잘 풀었는데 역의 이치를 잘 푸는 이는 변화를 잘하는 법이니, 겸재의 화법은 『주역』에서 얻어 그러하던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는 겸재 그림에서 음양의 대비란 외형상의 형태만이 아니라 그 내용과 정신까지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 훗날 송호(松湖) 유언술(兪彦述, 1703~1773)이 박대원(朴大源,
1694~1766)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화첩』에 부친 다음과 같은 글은 소박한 감상론이지만 실상은 겸재의 미학을 핵심적으로 잡아낸 명문이다.- P259
이는 겸재 팔십 노인의 그림으로 박대원의 소장품이다. 박대원은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아주 사랑하여 보배로 여기며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으니어찌 그 사랑하는 바가 그림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겸재는 그 흉중에 있는 바를 붓끝에 정신을 실어 발현한 분으로, 그는 늙어서까지 이를 잃지 않았다.
겸재의 그림을 말하는 세상 사람들은 문득 그 빼어나고 기이함을 보면서 절규하듯 말하기를 "핍진하도다" "신운이 감돈다"라고 하니 이는 그림을 아는소리이다. 그러나 겸재는 모르는 말이다. 박대원은 홀로 필법의 기교를 뛰어넘어 신회가 통하듯 겸재의 마음을 얻고 팔뚝 아래에 두며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니, 박대원은 이른바 그림을 아는 자는 아니지만 그림 보는 법은 아는 자가 아니겠는가.- P260
이런 그림들을 겸재의 첫 금강행 때 소작인 「신묘년 풍악도첩』과 비교해보면 초년작과 만년작의 차이를 한눈에 알게 되며 과연 같은 화가의 솜씨인가 의아심조차 일어나게 된다. 만년의 원숙한 노필이 갖고 있는 위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만폭동도> 를 보면 겸재의 적묵법과 스스럼없는 필치가 뒤엉켜 있는데 그 빠른 필치로 화면상에는 더할 수 없는 동감(感)이 일어나고있다. 마치 내금강 계곡의 물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한 생동감이 일어난다. 나무, 산봉우리, 바위, 물결 어느 것을 그리든 스스럼없는 붓놀림이 그대로 감지되니 이것이 바로 겸재가 말한 천취인가 보다.
<비로봉도>는 우뚝한 비로봉 아래 뾰족한 중향성 봉우리들을 배치한 단순한 구도지만 부드럽고 날카로운 붓의 거침없는 필세(筆勢), 그리고 능숙한 번지기 솜씨로 표현한 운연(雲煙)의 모습은 가히 천취를 느끼고도 남음이 있다.- P303
<만폭동도> <비로봉도> 선면 수묵 <금강전도>가 겸재의 금강산 그림 중남성적 진경산수의 멋이라면, 여성적 진경산수로서 만년의 명작은 단연코간송미술관 소장의 <금강대도>와 <정양사도>를 꼽게 된다. 이 작품들은 담묵의 은은한 설채와 필선으로 아름답고도 신비한 화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망원 렌즈로 포착한 듯 금강대를 강하게 클로즈업한 시각부터 노련한 경지인데 유연한 묵법은 실경의 사실성을 넘어 필법과 묵법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것은 현대미술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이형사신(神)의 극치라 할 만하다.
겸재 만년의 금강산 그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선면 수묵<금강전도>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우리를 부채살 모양에 따라 꺾어돌리듯 한껏 펼쳐놓은 구도로 더할 수 없는 박진감이 느껴진다. 이런 대담한 구도의 변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년의 자신감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는 경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안개를 표현한 담묵의 번지기는 그야말로 원숙미의 극치로 그 감동이란 실경을 보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P303
겸재 만년의 원숙미가 절정에 달한 작품, 그러니까 겸재의 대표작을 꼽자면 누구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박연폭도(朴淵瀑圖)>를 빼놓지 못한다. 사실상 겸재 예술의 최고봉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751년 겸재 나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인곡정사 뒷산으로 그 준수한 바위봉우리가 비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모습을 장쾌하게 잡아냈다. 바위봉우리의 미끄러운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몇 번이고 붓을 가하여 그 붓자국이 더욱 질감을 느끼게 한 것이 이 그림의 핵심인데, 이에 못지 않게 주변 산자락의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태점이 너무도 천연스런 붓놀림으로 묘사되어 화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박진감이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숲을 그리는데 농담의 밀도를 지니고 있고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성곽의 모습이나 적묵의 시커먼 바위 위에도 소나무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디테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치밀한화면 경영이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하나의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됨에는 그만한 노력과 완결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76세 노화가의 필치라는 사실이니 만년에도 최선을 다했던 겸재의 창작태도에 우리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P313
<인왕제색도>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대상에 충실하면서 박진감을 잡아낸 작품이라면, <박연폭도>는 대상을 과감히 변형시켜 사실성을 뛰어넘어 곧바로 회화미로 나아간 명작이다. 겸재가 이 작품에서 겨냥한 조형목표는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통한 화면상의 울림이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폭포수의 흰 물줄기를 강조하기 위해 양옆 벼랑을 한껏 꺾고 구부리고 짙은 먹으로 겹겹이 비비듯 칠하여 그 대비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강함을 생경한 곳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역시 소나무와 태점으로 활기를 넣어주고 있다. 정자 아래로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 선비의 모습과 절벽 위 성문으로 화가의 시점이 분주히 오르내리는 역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없으면서도 어떤정밀한 그림도 따라올 수 없는 박진감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바로 만년 겸재의 노필이 보여준 가장 큰 미덕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가 겸재 예술의 종점이었다. 겸재는 이렇게 자기 예술의 절정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박연폭포> 이후 겸재의 삶과 예술이란 그 절정의 여운일 따름이었다.- P313
겸재의 이러한 만년의 필치를 보면 인생과 예술의 오묘한 리듬을 생각하게 된다. 그림으로 말할 때 대상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며 미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는 성실성은 중년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런데 노년을 지나 만년의 무르익은 경지로 들어선 대가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을 정도로 그 치밀함을 버리고 대상을 되도록 간략하게 요약하려 든다.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는 것은 물론이고 형상의 골격 자체에 과장과 변형을 가하여 요점만 제시하고 만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불성실하고 소략하다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예술이란 오묘하여 그런 만년의 소략함이중년의 치밀함보다 더욱 박진감 있고 깊은 멋을 전해준다. 그것이 만년의 경지이다.
그러나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중년 시절에 만년의 작업을 시도했다면 그것은 불성실이고 일시 성공한다고해도 조로(早老)하고 마는 법이다. 겸재로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다 보내는노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런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버리지 않았다. 때문에 겸재의 만년은 더욱 원숙했고, 남들은 노년의 경지에 머물고 만 것을 만년에 이르러 한번 더 높이 끌어올렸던 것이다. 더욱이 겸재는 84세까지 장수하는 천복을 누렸다. 단원 김홍도를 겸재 정선과 비교할 때 아쉬운 것은 단원은 나이 60세 무렵에 세상을 떠나 겸재가 70대에 보여준 만년의 원숙함같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P316
조선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분인 겸재의 일생은 이렇게 끝맺었다. 그런데 겸재의 전기를 쓰면서 나는 겸재의 죽음에 대해 이상하리만치애도의 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에 임하여 일어나는 감정이란 오로지 그의 위업에 대한 공경과 찬양뿐이다. 한치 모자람이 없는 고마운 인생이었다는 감사의 마음뿐이다.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 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 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의 위업은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문인들의 상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시와 그림은 더욱 가까워졌고 그림의 사회적 위치도 한껏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겸재의 진경산수는 당대부터 많은 화가들이 추종하는 바 되어 그의 제자는 물론이고 화가라 지칭하는 사람으로 겸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강희언, 김희겸, 김윤겸, 정충엽, 정황, 마성린,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화풍‘이 형성되었고, 진경산수는 마침내 하나의 회화 장르로 확립되었다.-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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