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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그의 삶에 대해서는 비록 행장과 묘지는 아직 찾지 못했어도 방계 자료들을 통해 최소한의 관직 이동 상황과 예술적 환경 변화 및 작품의 편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최완수의 「겸재 정선 연구」(「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는 겸재의 삶을 현재로서는 완벽하게 복원해놓은 우리나라 문화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겸재의 가계는 물론 외가와 진외가의 족보까지 캐내고 그의 패트런이나 진배없었던 서울 장동(洞)의 안동 김씨 집안과의 관계도 소상히 밝혀놓았다.
그리고 최근 한문학과 미술사 분야에서 겸재의 측근이었던 관아재 조영석, 담헌(擔軒)이하곤(李夏坤), 사천(梭川) 이병연(李秉淵), 농암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등의 시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추진되어, 이들과의 교류를 통한 색의 인간적·예술적 면모가 다각도로 조명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의 삶에 대해대략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P186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문화·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사상에서 실학의 대두, 문학에서 한글소설. 판소리의 등장과 사설시조의 유행, 그림에서 현실을 소재로 담은 속화(俗)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 모두를 ‘리얼리즘시대‘의 산물로 이해해왔으며, 그런 인식 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 겸재의 진경산수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나는 최완수를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들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에서 완성된 조선 성리학이 노론의 정치적 이념으로 구현된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의 산물이라 주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 중견· 신진 학자들이 진경산수는 명나라 때의 <황산도(黄山圖)> 같은 실경산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학설은 겸재의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데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두 학설 모두 적지 않은 과장과 오해가 있었다.- P188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황산도>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해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에이동주, 최순우, 안휘준 등이 해석했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 사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겸재의 벗인 조영석이 겸재의 『구학첩(帖)』에 부친 그 유명한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겸재의 이 화첩은 먹을 씀에는 자취가 없고 번지기에는 법도가 있고, 깊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빼어남이 있다. 거의 송나라 미불(米芾)과 명나라 동기창(董基昌)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만하다.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이와 같은- P192
것은 볼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 동안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윤곽과 구도를 잡을 때 (화본에 나오는) 16준법(十六준法)에 두었기 때문에 계곡이 여러 모양으로 흐르고 굽어내리는 모습을 똑같은 필치로 묘사하면서도 아직껏 이것을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싸여 있어도 오직 한 가지수묵법으로만 표현되어 그 앞과 뒤,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 얕고 깊음, 그리고토파(土坡)와 돌의 평평하고 험한 세를 가려 표현하지 못했다. 물을 그려도잔잔함과 급함을 구별하지 않고 두 붓을 새끼 꼬듯 비껴서 아울러 잡고 그렸으니 어찌 산수가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런 주장을 했을 때 겸재 또한그렇다고 했다.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마주하고 그렸다. 산의 주름을 그리고 먹을 씀에 저절로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나 보면, 다 쓴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P193
이하곤은 해악전신을 보면서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데생력(사생력)도데생력이지만, 형사가 아니라 전신으로 재해석해서 나타내는 능력이 있음을보고 이 같은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이하곤은 이것을 갖고 싶어하며이렇게 말했다.

사천이 금화를 다스릴 때 겸재와 함께 동쪽에 가 놀면서 해산(海山: 금강산)의 기이한 곳을 만나면 문득 붓을 들어 모사케 하여 무릇 30여 폭을 얻었다. 이윽고 김창흡과 조유수에게 부탁하여 각 폭마다 발문을 짓게 하고 또 내게도 이어 부치게 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여기에 써서 공간을 메운다......
흉중에 모름지기 하나의 금강산이 따로 있어서 이빨과 가슴이라는 것이 모두 구름과 언덕과 나무와 바위로 되어야만 그런 후에 가히 금강산을 잘 보았다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그림이나 문자들은 모두 사족에 속하는 것이다. 사천이 안목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그림을 나에게 주어야한다. 한번 크게 웃으며 담헌거사는 또 희제(題)하노라.

이하곤의 입장에서는 진경산수의 진면목은 남종산수화의 한 이상인 흉중구학(胸中丘壑)을 그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형사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대상에 얽매이지 말고 강약의 변용, 과장과 생략이라는 살활조종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점은 겸재 입장에서도, 이병연 입장에서도, 김창흡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진경산수의 미학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전신으로 나아가는 이형사신(以形寫神)에 있다.- P223
그러나 겸재가 섣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의 업적을 생각할 때 보통 그 결과만을 갖고 평가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대단히 준엄한 것이다. 이 역사적 평가에만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한인간이 한 화가가 어떤 노력 속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낳게 되었는가라는 그 과정과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성실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겸재의 경우 우리가 그를 위대한 화가로 칭송하는 것은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도> 같은 박진감 넘치는 진경산수에 있다는 것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겸재는 그 위대한 민족적 화풍인 진경산수를 창출하기 위해 기해년화첩』 같은 남종문인화풍에도 열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는 고루한국수주의적 색채나 지방적 낙후성에 빠지지 않고 국제적 시각에서도 당당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국제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고전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나이 40대 때 『기해년화첩」 정도밖에 그리지 못했던 겸재가 20년 뒤인 59세 때는 <금강전도>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던 것에는 이런 역량의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겸재는 대기만성형의 대가였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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