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재가 그린 <조영복 초상>은 그가 당대에 왜 인물화의 대가로 손꼽혔는지를 유감없이 증명하는 명작이다. 우리나라의 초상화 전통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는 당장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조영복 초상>의 뛰어난 사실성으로 알 수 있다. 관아재의 <조영복 초상>은 거의 초상화가들의 정형화된 초상화의 전통에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선비화가다운 다른 면모를 보여줌에 주목하게 된다.
우선 조영석의 초상화에는 인물의 기품이 넘처흐른다. 기존의 초상화에서도 신중하게 추구했던 전신의 가치가 여기서 더욱 역력히 살아나고있다. 사대부적 기상이란 화원이 아닌 사대부화가의 손에서 더욱 살아나고있음은 공재가 그린 <심득경 초상>에서도 이미 보아왔듯이 관아재의 초상화 또한 고고한 선비의 분위기를 품위 있게 잡아내었다.
둘째는 형식에서의 자유로움이다. 기존 화원의 초상화는 주어진 초상화의 규범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관아재는 그런 제약에서 일탈할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대부화가의 유리한 조건이었다.
사각건(四角巾)에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빨간 도포끈을 동여맨 평복(平服:服)을 입고 있는 모델의 모습은 공식적인 엄격성을 벗어나고 있으며, 몸체를 마치 커다란 자루 속에 담은 것처럼 과장의 파격을 보여준 면은 더욱 그렇다. 특히 무릎 위에 가볍게 놓은 양손의 표현은 이 초상화의 백미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초상화에서는 대개 손을 그리지 않았다. 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손을 소매 속에 감추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초상화의 초점을 얼굴에 맞추기 위한 조형적 관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을 그리면 초상이 훨씬 자연스럽고 더 인간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이처럼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손을 그린 것은 <신임(申) 초상> <강세황 자화상> 이외에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 초상>밖에 없다.- P134
나는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오직 산수와 시와 그림만은 독실하게 좋아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를 궁구한 바는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얻지는 못하였다.
무릇 시를 배우는 일은 숭상받아 왔다. 그림도 깃발이나 종정(鼎)에 사용되면서부터 오랜 옛날의 성인들이 없애지 아니한 것이다. 산수를 유람하는 일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고인일사(高人逸)나 시인들은 말할 것도없고 후세의 대현명유(大賢名儒)들조차 기쁜 마음으로 종종 홀로 내달려 그윽한 곳에 이르는 일을 떠올리면서 마치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무릇 시는 성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며, 그림의 경우는 문장과 글씨가 해낼 수 없는 것을 그림에서 구하는 것이니 진실로 취할 바가 있는 것이다.
저 맑게 흐르는 물이나 하얗게 드러난 바위는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여기에서 무엇을 취하겠는가?- P140
동자를 데리고 그윽한 곳에 은거하며 독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 선비의 집에 눈 내린 어느 날, 한 친구가 동자에게 고삐를 쉬게 하고 소를 타고찾아왔다. 이에 두 선비는 서재에 마주 앉아 고담준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이야기이다.
집주인은 학창의를 입고 있고 방문객은 두건을 쓰고 있는데 모두 의젓이 정좌하고 있다. 이때 창문은 닫혀 있었겠지만 화가는 그림을 위해 창을 열어놓았는데 방안에는 책이 그득하다. 이 두 인물 묘사에서 우리는 그들이 다름 아닌 조선의 선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이처럼 조선 그림에 조선의 선비가 정확하게 표현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 나그네를 묘사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P168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 신선. 나그네를 묘사한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 하단을 보면 동자 둘이서 자유스런 몸짓으로 반가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속화의 한 장면처럼 삽입되어 있다. 관아재는 양반들이 격식을 차릴 때 머슴과 동자는 마냥 자유스럽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이렇게 명쾌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도판21 또 질질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고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눈 덮인 뒷산,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겨울 소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마른 가지에 핀 눈꽃에는 선비화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취가 물씬 풍기고 있다.
관아재가 이런 대작의 명작을 좀더 많이 남겨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인 화인으로 살 수 있었다면 우리의 이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었으련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던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P168
그는 평생 개결한 선비로 일생을 살고 싶어했다. 비록 미관말직을 지내더라도 생욕. 색욕· 관욕. 재욕 등 4욕(四慾)을 경계하며 흐트러짐 없는삶을 영위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을 좋아하였다. 그는 그림이 세상에 공헌하는바, 인간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하며 글과 시가 할 수 없는 것을그림이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란 현실 속에 있어야 한다는 투철한 사실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은 화보 속의 인물이 아니라 대개 현실 속의 인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서민들의 삶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그린 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원법(院法)에 선비화가들의 문학에 배어있는 유법(法)을 발현하여 그림의 격조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세상에는 관아재의 이런 그림 재주와 취미를 간혹 천한 환쟁이와 동일시하며 비방하고 폄하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관아재는 선비로서 품위를 잃는 것을 싫어하여 그림에서 손을 떼고는 삼갔다. 그가 두 차례나 어진 제작에 참여하라는 왕명을 거역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화인이었다. 그림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주옥 같은 명화, 그것도 속화와 조선적인 인물화에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관아재는 겸재의 진경산수를 평하여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조선적인 산수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관아재에게 그대로 돌려 "조선적인 인물화는 조선 3백 년 역사 속에 관아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