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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죽음에 대한 소고


어떤 문제들은 일단 깊이 생각하고 나면 삶 속에서 우리를 격리시키고, 우리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그때에는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어진다. 정신적 모험이나 다양한 삶을 향한 막연한 정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느끼는 유혹들은 감수성이 풍부해서 느끼는 것뿐이다. 거기에는 현기증 나는 존재론적 질문을 해보았던 사람들이 특징적으로 갖고 있는 진지함이라고는 없다. 그것은 흔히 진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표피적인 심각함을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격한 광기로 언제든 자신의 삶을 영원의 맥락 속에서 성찰하는 긴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P38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순간순간 강렬하게 체험하여 그 흐름 자체가 사라지는 때다. 순전히 형식적인 문제들은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끝없이 진지할 필요가 없다. 그 문제들은 우리 존재의 심층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이 불확실해서 생기는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유기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이란 헛된 사변이 아니라, 생생한 내적 고통에서 우러나오는 그무엇이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만이 진지할 수 있다. 삶의 안정이 깨어졌기 때문에 생각에 잠기는 사람은, 생각하는 기쁨만으로지성을 가동시키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피와 살의 자취를 품고 있는 사고를 원한다. 공허한 추상적 사고보다는 육체적 격정이나 신경의 파탄에서 오는 성찰을 백배 더 원한다. 피상적인 지적 유희의 시간은 지나갔다는 것, 절망의 외침이 치밀한논리보다 훨씬 더 진실하다는 것, 눈물의 뿌리가 미소보다 더 깊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생생한 진실만이 갖고 있는 가치를 왜 우리는 거부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마- P39
지막 고통이라고 느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죽음의 기분이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의 삶은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흘러간다. 삶과 죽음을 별개로 생각하고, 죽음을 삶을 벗어난 현실로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을 존재에 내재한 숙명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크게 착각하고 있는 중대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삶이 죽음의 포로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표면적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본능적 순진무구함이 깊은 번민으로 변하는 순간에 형이상학적 발견이 시작된다.
삶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때 죽음을 의식하게 된다는 사실은 삶에 죽음이 내재한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생명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삶의 저주스러운 측면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한가 알 수 있다.
죽음이 삶에 내재한다면, 죽음에 대한 의식은 왜 우리를 살 수- P40
없게 만드는가? 평범한 사람의 생활은 죽음을 의식하더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생명력이 약해지는 것으로 간단히 시작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에게는 마지막 순간의 고통만 있을 뿐 죽어가는 고통이란 없다. 살면서 떼어놓는 발자국 하나하나는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하여 떼어 놓는 발자국이며, 추억이란 허무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형이상학적 감각이 없으므로, 피할 수 없는 죽음 속으로 서서히 진입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삶의 의식에서 벗어나 죽음을 발견하면서 받는 강한 충격은 순진한 믿음, 환희를 향한 충동, 본능적 쾌락, 이 모두를 파괴한다. 죽음에 대한 의식에는 더할 나위없는 피폐함이 있다. 그때에는 삶에 대한 순진한 시적 감흥이나 매력뿐 아니라 목적론적 가설이나 종교적 환상들까지 알맹이 없는 텅 빈 껍질로 드러나게 된다.
삶이 긴 죽음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은 개인의 경험을 천진난만함의 틀에서 떼어내어 그 무가치함과 무의미함을 폭로하고, 삶 자체의 부조리한 본질로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이 퍼져나가 나무를 쓰러트리고, 꿈속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꽃도 문- P41
명도 시들게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눈물과 회한 너머, 모든 형상이나 체계 너머에 도달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목이 졸리고 질식하며 소름끼치는 환각을 겪는, 피가 분출하는 듯한 불가항력으로 나를 둘러싸는 그 무서운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삶의 저주받은 성격도,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내적 혼란도 알지 못한다. 그 우울한 흥분 상태를 통해서만 왜그렇게 간절히 세상의 종말을 바라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천국의 환영에 빠진 우리의 생명력이 비물질로 승화되고 순수성의 영역을 향해 올라가는 빛나는 도취가 결코 아니다. 죽음이 뱀 눈과 같은 마력을 발산하며 등장하는 위험하고파괴적이며 비정상적인 도취이다. 그러한 감각이 현실의 본질을보게 만든다. 삶과 죽음에 대한 환상을 사라지게 한다. 죽음의고통이 삶과 죽음을 뒤섞는다. 사는 것은 죽어가는 고통의 연장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라는 것은 존재의 저주받을 변증법, 즉 파괴로부터 새로운 형태가 잉태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은 실제 나아지는 것도 없이 형태와 내용을 파괴하고, 낡은 것을 새것으로 대체하려는 그 무분별한 에- P42
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상대성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생성법칙에 자신을 내맡기고 순간순간의 가능성을 맛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천진난만함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이다. 그러나 삶을 긴 죽음의 고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하나의 질문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병이 들거나 우울할 때 죽음이 삶에 내재해 있음을 발견한다. 비록 삶에 내재한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길도 있지만, 그것은 그저 우연하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것이며,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
병이 철학적 임무를 띠고 있다면, 아마도 삶이 영원하다든가삶에 목적이 있다든가 하는 명제들이 얼마나 허망한 환상인가를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병은 항상 죽음을 의식하게 한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젊은이들은 죽음을 마치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단 병으로 충격을 받고 나면 젊은이다운 모든 환상을 잃는다. 진정한 경험이란 오로지 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나머지 경험들은 모- P43
두 간접적이다. 신체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면 경험은 오직 암시로 이루어지며 상상을 통해서 복잡해진다. 육체적 고통을 받는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진지해질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절망과 죽음의 고통에서 나오는 형이상학적 깨달음보다는 천진난만한 사랑이나 즐거운 무의식을 선택할 것이다.
모든 병은 영웅적이다ㅡ정복이 아니라, 잃어버린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로 나타나는 영웅적 저항이다. 병으로 타격을 받은 사람들이나 우울증이 체질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 일부 우울증 환자들에게 보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반 심리학으로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이 활기로 넘치다가도 죽음에 대한 공포, 아니 적어도 죽음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부딪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울한 상태의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그 상태에서는 세상과 나 사이에 단절이 깊어지면서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존재에 내재한 죽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라는 핵을 둘러싼, 사회가 만들어 놓은 바깥 껍질들을 하나하나 뚫고 들어가는 내면화과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과정이 절정에 이르러 일단 핵 속- P44
에 들어가고 나면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이 공존하는 영역을 만나게 된다.
우울증과 죽음에 대한 의식이 공명하면 평온이나 안정이 영원히 사라진다. 그리고 불안이 끝없이 이어진다.
삶의 구조 자체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구성 속에없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없음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삶을 삶의 부정이라는 원칙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없음‘이 결국 삶을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없음을 향하는 도정을 현재화한다.
삶ㅡ특히 인간의 삶ㅡ이라는 크나큰 비극의 귀착점은 삶이 영원하다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 환상인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영원을 순진하게 믿는 것만이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위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모든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귀결된다. 공포에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본질적 현실 앞에서 나타나는 반응의 여러 양상일 뿐이다. 개인의 불안들은 모- P45
두 숨겨진 교감에 의해 본질적으로 공포심과 연결되어 있다. 인위적 이성 작용을 통하여 거기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잘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구축물을 통하여 신체적 불안을 없앤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를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멸의 종교를 추종하게 하는 것도 바로 그 두려움이다. 인간은ㅡ확신이 없을지라도ㅡ 자신이 살고 있고 기여하고 있는 가치의 세계를 구원하려고 고된 노력을 기울인다. 시간적 차원의허무를 극복하고 영원한 보편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추상적인 형식과 범주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주장하는 보편성은 돌이킬 수 없는 소멸 과정 앞에서 환상이 되고 만다. 어떤 이성적 형식이나 범주로도 존재의 근본 구조를 파악할 수 없으며,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주의나 이성주의가 죽음 앞에 내밀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개념이나 교리도 죽음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거의- P46
없다. 죽음에 대해 유일하게 적절한 태도라면 침묵하거나 절망을 외치는 것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없는 것이고, 일단 죽게 되면 나는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그들은 천천히 죽어가는 고통이라는 그 기이한현상을 잊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죽음을 억지로 구분한다 해서, 죽음을 현실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어떤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는가? 돌이킬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치밀한 논리나 논증이 무슨 의미가있겠는가? 실존의 문제를 논리의 각도에서 고찰하려는 일체의시도는 실패하게 마련이다. 철학자들은 너무 오만해서 죽음에대한 공포심을 고백하지 않으며, 너무 건방져서 병이 정신적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을 성찰하면서평온을 위장한다. 그러나 실상 가장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은 그들이다. 철학이란 번민과 괴로움을 위장하는 기술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죽음의 고통을 의식하고 느낄 때 따르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절- P47
박한 감정은 우리가 죽음이라는 현상을 결코 사랑이나 호감을 갖고 맞을 수 없게 한다. 거기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섞인 체념밖에없는 것이다. 죽는 방법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어떤 규칙도 어떤 테크닉도 없다. 각 개인마다 무한한 신체적 고통과 긴장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속에 각인된 죽음의 돌이킬 수 없는 성질을경험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 속에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죽음의 고통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없음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맞이하는 고통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그 마지막 고통이 존재에 대한 중대한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을 의식하는 느린 고통의 의미를 알려 하지 않고,
최종 순간에 모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은 별로 대단한 것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채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고통이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은 시간이라는 것이 창조의 조건일 뿐 아니라, 죽는다는 극적 현상의 조건이기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에 똑같이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순환 속에서 양자를 수렴하여- P48
초월할 어떤 가능성도 보여주지 않는 시간성의 저주와 다시 부딪힌다.
시간의 저주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절박한 감정을 부추기고, 우리의 가장 내밀한 정신적 성향들을 강압적으로 억누른다. 쓰디쓴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믿는 것, 숙명에 복종하는 것, 시간이항상 파괴라는 비극적 과정을 시작하려고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아는 것-자, 이것이 바로 실존의 냉혹한 표현들이다. 그렇다면없음이 구원이 아닌가?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어떤 구원이 가능하겠는가? 존재 속에서 거의 불가능한 구원이 어떻게 존재 밖에서 이루어지겠는가?
존재 속에도, 없음 속에도 구원이 없으니, 세상과 그 영원한 법칙은 사라져버리기!-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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