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꽃 아래서
너는 작으니까 많은 걸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늘에 젖거나 망상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
너는 작고 작은 것이니까
공중에 떠 있지 않아도 된다
떠 있어도 된다
분홍 보라꽃등을 끄고,
잠들어도 괜찮다
너는 보잘것없는 것이니까
잊어도 괜찮다
못잊어도 괜찮다
살아도 좋다
살지 않아도 좋다
너는 미물이니까,
참아도 된다
참지 않아도 된다
제정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제정신이어도 괜찮다- P50
너는 없는 것이니까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분홍 보라 꽃등을 켜고
이제, 나타나도 좋다- P51
잎들은
등나무 긴 줄기에서 잎들이
늦었다고
더디다고
돋아난다
깨알만한 손톱만 한 것들이
많이,
아주 많이
늦었다고
그러나 어느 봄 숲 여름 계곡에도
바쁜 잎들은 없네
등나무 마른 줄기에서 잎들이
빠르다며
이르다며
떨어진다
다 커서 더는 자라지 않는
시든 것들이,
이건 너무
금방이지 않느냐고- P80
그러나 어느 가을 산 겨울 들판에도
게으른 잎들은 없네- P81
봄은
망하고 망하면서 봄은 간다
망하고 다 망해서
봄은 간다
얻어맞고 나뒹굴며 맨발로
쫓기어간다
부딪히고 고꾸라지고 신음하며
휩쓸려 간다
움켜쥐고 물어뜯어도
꿈쩍 않는 여름 가을속으로,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겨울 속으로
부모 형제 친구를 다 잃고
대오와 참호와 깃발을,
전쟁과 평화를 잃어버리고
끝없이 패주하며
이편에서 저편으로,
처자식들 아득히 버리고
숨 거두며 간다- P82
살해되고 섬멸되며 어딘가로
봄은 간다
각자도생도
구사일생도
기사회생도 없이
기어갔다 굴러갔다 날려갔다
숨 거두고 난 뒤의
눈벌판으로
봄은,
봄으로 갔다
따스하고 간지러운
개구멍들로,
온 세상에 뚫린 저 세상으로
봄은 갔다
검은 신의 검은
인공호흡 속으로
봄은 죽고, 봄은 온다- P83
먼 훗날처럼
먼 옛날처럼 온다
봄은 죽고
봄은 태어났다
죽은 봄은 살아간다
붉고 녹고 푸른 곳,
꽃피고 지고 새우는 곳,
어둡기만 한 빛 속으로
가도 가도 환하기만 한
어둠 속으로-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