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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여기에 모은 것이 8월 15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쓴 시의 전부이다. 처음부터 서문 같은 것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일기처럼 날짜를 박아가며 써 나온 이 시편, 이 속에 불려진 노래가 모든 것을 해답할 것이다.
대체로 전일 내가 쓴 시들이 어드런 큰 욕심과 자기를 떠난 보람을 구한 것에 비하면 여기 이 시집 속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자신에 충실하고 어떻게 하면 이 현실에 똑바를 수 있을까를 찾기 위하여 다만 시밖에는 쓸 줄 모르는 내가 울부짖고 느끼며 혹은 크게 결의를 맹세하려던그날그날을 조목조목 일기로 적은 것이 이 시편들이다.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나의 시 속에 아직도 의심하고 설워하는, 아직도 굳건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내 시를 사랑하는 이들은 두말없이 나의 온몸에 채찍을 날리라. 그러나 다만 보잘것없는 나의 성실이 어떠한찌꺼기를 버리지 못한 것이라 하면 그대들도 나의 타고난 이 문제에 대하여 또 이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 될 현실에 대하여 따뜻한 이해를 가지라.
옳은 일이나 옳은 말이란 아무 때이고 남에게 곯림을 받는 것임을 이중에도 뼈아프게 돌이킨다. 언론 자유, 출판 자유, 이렇게 휘번들한 간판밑에도 용기 없는 사람은 자유를 갖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나는 ‘지도- P620
자」와 「너는 보았느냐」의 두 작품을 비굴한 신문 기자 때문에 발표치 못할 뻔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우리의 선배와 동무들은 이것을 세상에 물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어이없는 일은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의 수난인데 이것을 그 당시 방송국에서 갖다가 어느 편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그들이 작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연합군‘이란 문구를 ‘미국군‘
이라고 전부 고쳐 방송한 일이다.
내가 이 시집을 하루바삐 내어 세상에 묻고자 함은, 이 어려운 세월을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려고 한다고 외치고 싶음이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문화전선을 좀먹는 무리들의 악의를 벗어나 진실로 속여지지 않은 내 의사를 이렇게 표시할 수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기도 위함이다.
1946. 3. 12.
서울대학부설의원 입원실에서
(시집 『병든 서울』, 1946. 7.)- P621
『나 사는 곳의 시절은 1939년 7월서부터 동 45년 8월, 역사적인 15일이 올 때까지다. 불로소득을 즐기고 책임 없는 비난을 일삼던 그때의 필자가 인간 최하층의 생활을 하면서도 아주 구할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으로 시를 영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나 사는 곳‘과 그때의 ‘나 사는 곳‘ 사이에는 사회적으로도 크나큰 변동이 있었지만 내 개인의 정신상의 변화와 그 거리는 말할 수없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아직도 늦지 않았음이다. 지난날의 『나 사는곳을 가리켜 이것이 암첨(暗瞻)하던 한 시절 조선 안에 살고 있던 조선사람의 내면 생활을 그린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생각던 것이 지금은 지난날 나의 안계의 넓지 못했음을 한할 뿐 기후에 따라 오르내리는 수은주와 같이 그때, 그때, 이 땅에 부딪치는 거칠은 숨결에 맞춰서 노래한 여상(如上)의 시편들이 가ㅡ지끈 불러진 열의로도 휴지가 아니기를 바란다.
편중의 일부분은 만가(歌)-즉 『문장이 폐간되던 그 호에, 『조선일보』가 폐간되던 그날에 ㅡ이 밖에는 우리의 모든 기관이 정지되어 지상에 발표라는 가망도 없을 때, 다만 암첨하고 억눌리는 공기 속- P622
에도 나를 사랑하는 선배와 친지들을 보이기 위하여서만도 쓴 것이었다.
사랑하는 내 땅이여, 조선이여! 행동력이 없는 나는 그저 울기만 하면후일을 위하여, 아니 만약에 후일이 있다면 그날의 청춘들을 위하여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자와 무력한 호소겠으나 정신까지는 썩지 않으려고얼마나 발버둥쳤는가를 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 노래를 우리 앞에 어엿이 내놓게 될 때, 어이없다. 나 사는 곳이 이러할 줄이야.
두서(頭)에는 최신작 ‘승리(利)의 날」을 부첨하여 오늘의 나 사는곳을 알린다. 이제는 나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는 곳이다. ‘내‘가
‘우리‘로 바뀌는 사다리를 독자들이 이 시집에서 찾는다면 필자는 망외(望外)의 행운이겠다.

1947년 5월 공위(共委)가 재개되는 날
(시집 『나 사는 곳』, 1947. 6.)- P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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