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전당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P36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P37
모란의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세상 모두 숨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몸이 출렁이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뭐 이런 시간
뭐 이런 절벽
뭐 이런 벼락
죽을 수도 있는 시간
죽어가는 어떤 시간- P54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P55
백조의 호수 옆에서
고독은 아무리 고독해도
충분하지가 않다
가난은 아무리 가난해도
다 가난하지가 않다
고독한 사람은 주소가 없는 신전에
시간도 없는 신전에 산다
천장에 형광등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고독이 울타리 안에 무럭무럭 자라서
흙의 성분에 따라 여기저기서 다른 색깔로 피어나는 수국처럼
파란 꽃송이 연분홍 꽃송이 하늘색 꽃송이 결국은 하얀꽃송이 되어가며
고독은 도도한 명패를 걸어둔다
어처구니없게도 고독은 가난조차도 도도하다
춤추며 몸을 떠는 백조처럼 차고 도도하다
닫힌 방에 꽃이 너무 만발하면
꽃이 공기를 다 먹어치워 캄캄한 폐에 당도한다
고독은 그런 병을 가졌다
벌레도 꿀벌도 없는 꽃이 되어가는 병이다- P64
닫힌 문의 고독은 그렇게 질식의 경지에서 만발한다
고독은 그렇게 고독사가 된다-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