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늙은 무사


하도리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옆집 하르방은 볼 때마다 맵쌌다
인사해도 고개를 틀어 받는 둥 마는 둥
말하지 않아도 냉랭하게 들렸다
재수 없게 육지 뜨내기가 굴러들어왔다고
뭐라도 물어볼라치면 쏴붙이는 "무사?"
숯검정 눈썹을 갈아세우고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싸울 준비를 마친 무사,밖에 없었다
느닷없는 가을 태풍이 왔다
코를 골며 평온한 것은 어린것들뿐
굉음 한가운데서 벌벌 떨며 한숨도 못 잤다
제주에 오래 살고 싶다던 아내는 몇시간 만에
머무는 곳이지 사는 곳은 아니라고 말을 바꿨다
밤새 꼬박 부서지던 폭풍우가 육지로 떠나자마자
들이댓바람에 달려온 하르방
ㅡ어떵안해신냐? 애기들 다치진 안했고?
따지듯 묻더니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발길을 돌린다 우물쭈물 뒤따라가자
가차 없이 가래 끓는 무사,가 날아온다- P28
별일 없으신지 잠은 잘 주무셨는지 안부를 묻자
ㅡ 이 보름에 소름이, 소름이 좀이나 자져?
더듬더듬 사투리를 번역하는 사이
폭풍같이 쌩하니 사라지는 무사
쌩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겨루자면
무너진 돌담에 쏟아지는 햇살도
날아간 지붕에 솟아난 아침 달도
늙은 무사에 질 수는 없었다- P29
눈길을 따라가다


죽을 것 같은 고통만 남고
죽지는 않았을 때 바다로 갔다
등을 돌리고 보이는 것은 사람뿐이라서
머나먼 시골 바다로 갔다
관광객이 보이는 주말이면
깊게 숨은 절벽에 누워
별빛과 파도에 숨소리를 조율했다
그리운 것이 지면 그믐달이 떴다
외로움만은 끝끝내 더러워질 수 없다고
노래할 때마다 바다는 더 외롭게 아름다웠다
먼바다를 향해 사람의 마을을 등지고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늦은 저녁부터 태풍이 덮쳤다
분노보다 더 가속도가 붙더니 결국
영등할망은 몰고 가던 바람의 고삐를 놓쳤다
귓속에는 사람들의 허상을 찢는 전투기 소리
담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불과 물이 끊겼다, 폭격이 멈춘 아침- P32
안부를 묻는 사람들과 마을이
하나같이 쓸쓸했다, 한없이 화창했으므로
세수 못한 얼굴들이 난민처럼 막막했다
잠잠해진 바다는 더 깊고 푸르렀으나
폐허로만 사람 사는 곳으로만
자꾸 눈길이 갔다- P33
나무수국

꽃보다 그늘이 아름답지
한밤중일수록 그늘은 더 환하지

한껏 피어나서 지지 않는
속옷만 스쳐도 아리는 몸살
태동이 사라진 아랫배가 서늘하다

단번에 그믐 쪽으로 건너뛰고 싶은
보름달 아래
나무수국 아래
젖을 주는 여자

배고파 우는 무정한 그늘
텅빈 흰 그늘- P35
노을 알레르기

집시가 말했다
지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아라베스끄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성곽에 번지는 노을,
그 붉은 침묵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패멸한 왕이 울며 성을 내어주던 날
홀로 망루에 서서 사라진 후궁처럼
노을 한가운데 매달린 사람이 있었다
유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에 우는 자가 할 수 있는 건
눈물로 얻은 소금 한줌을 뿌려
부패해가는 시간을 하룻밤 더 연장하는 것일 뿐‘
금지된 노을을 뒤돌아보면
그리운 얼굴 만지고 싶은 몸은 온통
소금기둥으로 굳어져 부서진다
도무지 잊을 수 없어서 아름답게 조작해버리는 
기억처럼
누구나 공평하게 표절하는 것이 또 있을까
망각을 위한 연주는 없는가 집시에게 물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지워낼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P52
노을빛에 온통 미어져 밀려간 사람을 연주하겠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의 빈 가슴을 노래하
겠네
허풍선이 바이올린이 삐걱거릴수록
소금창고처럼 건조하고 쓸쓸한 성곽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건
어긋난 사랑이 아니라 썩어가는 몸,
결단코 조작할 수 없는 몸
소금창고에 매달려 그 여자 대롱거리고 있었다
늘어진 혀, 붉은 구더기들
가슴을 긁어 피가 터질 때까지
판자처럼 부서진 머릿속으로 또다시
스멀스멀 노을이 기어들어온다- P53
연시가 녹는 시간

초겨울 아픈 이마를 짚어주다 말고
연시 두개 냉동실에 넣어두었지요

차갑게 베어문 채로 사월 꽃비를 봅니다

연하고 부드럽고 슬퍼서
얼릴 수도 없었던 시간

낙화까지는 살아남겠다.
얼음에 쓴 서약이 있었습니다- P64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