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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알래스카 북극권에 봄의 징조가 나타나는 6월이 되면 카리부를 촬영하기 위해 해마다 꼭 들어가는 브룩스 산맥의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서 제고 리버라는 강이 북극 평원으로 흘러든다. 최근 13년 동안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에스키모 마을은 브룩스 산맥을 넘어 2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카리부 떼는 매년 반드시 그 계곡을 지나간다. 이 이름 없는 계곡이 아마 알래스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일 것이다. 그곳에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풍경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지만 그와 반대로 만물이 내게 속한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이끼 낀 바위, 툰드라에 솟아오르는 작은 언덕, 계곡을 지나가는 극복의 바람……
낚시꾼에게 자신만 알고 싶은 소중한 강이 있듯이 나에게 그계곡은 나만 알고 싶은 소중한 장소였다.

카리부는 극복의 방랑자다. 어느 날 갑자기 툰드라 너머에서나타나 바람처럼 툰드라 저편으로 떠나간다. 아무도 그들이 간곳을 쫓아 뒤따를 수 없다.- P84
알래스카에 이주하고 두 번째 맞는 봄, 나는 이 계곡에서 처음으로 카리부의 계절이동을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하얀 눈밭인 그 위를, 긴 선을 그리며 행진하는 카리부 떼. 그때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야생동물의 모습을 엿본 것만 같았다. 이는 카리부의 장관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북쪽으로 향해 가려는 카리부의 의지와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신기한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광활한 땅을 실감했다. 인간과 관계가 없는 세계가 지닌 생생하고 드넓은 공간에 감동받았다. 그경험은 내가 알래스카라는 땅에 뿌리내리기로 결심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도 이 계곡에서 처음 봤다.

베이스캠프에서 북극 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봄소식에 세상이 급속도로 바뀌는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설원 곳곳에 까만 흙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느 날 갑자기반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강이 성난 파도처럼 움직인다. 순식간에 남쪽에서 찾아온 뇌조, 검은가슴물떼새, 수많은 도요새, 물- P85
떼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기 그지없던 툰드라가 마치 되살아난 듯 화려해진다.
강둑을 산책하다 보니 해마다 야생 크로커스가 꽃피는 장소가 있었다. 나는 봄에 가장 먼저 피는 연보라색의 그 꽃을 좋아한다. 거기 그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왠지 안심이 됐다. 한달이나 혼자서 캠프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이누그러졌다.
나는 그 꽃을 보며 카리부의 이동을 봤을 때처럼 한없는 신기함을 느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그 꽃은 매년 봄이 되면 땅끝과도 같은 그 계곡에서 봉오리를 맺는다. 자연이란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그것은 여전히 흥미롭고 변함없이 신기했다.

5년 전 알래스카에서 죽은 카메라맨 친구의 재를 동료와 함께 가문비나무 아래에 묻은 적이 있다. 매킨리 산에 가까운 이글바레이라는 계곡이었다. 재를 묻은 작은 언덕에서 가문비나무숲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P86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유기물과 무기물, 삶과 죽음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언젠가 내 육체가 사라지면 나도 내가 좋아했던 장소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 툰드라의 식물에게 약간의 양분을 주어 극복의 작은 꽃을 피우게 하고, 매년 봄이 되면 아득히 먼 저편에서 카리부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것을 나는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P87
몇 년 전 나와 똑같은 말을 한 친구가 있었다. 도쿄에서 바쁜편집자 생활을 보내던 그는 간신히 일을 마무리하고 나의 알래스카 여행에 동참했다. 남동알래스카의 바다에서 고래를 쫓는여행이었다.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였지만 운 좋게도 그는 고래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보트 가까이에 나타난 거대한 혹등고래 한 마리가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고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할 말을 잃게 만드는압도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일이 바빴지만 알래스카에 오길 정말 잘했어. 왜냐고? 내가 도쿄에서 정신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보낼때에도 알래스카의 바다에서는 고래가 솟구쳐 오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정말 좋아."
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일상에 쫓길 때에도 다른 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것을 유구한 자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아니 마음 한구석에서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어쩐지 살아가는 힘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91
인간에게는 분명히 두 개의 소중한 자연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관계를 맺는 친근한 자연. 그것은 길가의 풀꽃이거나 근처에 흐르는 강물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아득히 먼 자연. 그곳에 갈 필요는 없다. 그냥 그곳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우리에게 상상력이라고 하는 풍요로움을 건네주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를 본 내 친구는 지금 어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P92
길고 혹독한 겨울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겨울이 없으면 봄소식이나 해가 지지 않는 여름, 또 아름다운 극북의 가을에 대해 이토록 고마운 마음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면 사람들이 꽃에 대해 이 정도로 강렬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눈이 녹으며 일제히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은 식물들이 긴 겨우내 쌓인 눈 밑에서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도 어둠 속에 잠긴 겨울 동안 꽃에 대한사랑을 키우는 것 같다.

돌고 도는 계절, 끝없는 저편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문득 멈춰 설 수 있다. 그 계절의 색이 우리에게 한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겨울을 보낸 후 느끼게 되는 자연의 풍부한 혜택에 대한 강렬한 마음..... 아메리카 붉은 다람쥐도 우리와 똑같이 긴 겨울을넘겼다.- P115
첫눈이 내린 날,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마음이 들 것이다. 잠깐 지나가는 극북의 여름 동안 사람들은 너무 분주하게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지친 것이다. 그리고 겨울 소식은 무슨 이유인지 사람의마음에 기분 좋은 단념을 심어준다. 그것은 어딘지 비가 오는날 집에 있을 때 느끼는 마음과 닮았다. 이제부터 길고 어두운계절이 시작될 텐데 첫눈을 보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은 그런까닭이 아닐까?

그리고 눈은 참으로 따뜻한 존재다. 생물들은 생존을 위해서눈에 적응했고 또 생존하려면 눈이 필요했다. 담요처럼 땅을 덮어주는 눈이 없으면 그 밑에서 겨울을 넘기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혹한의 겨울을 살아낼 수 없다.

겨울의 따뜻한 온기는 우리 마음에도 전해진다. 무기질의 하얀 세계는 사람의 마음에 불을 밝혀 희미한 상상력까지 내어준다. 눈이 없는 겨울의 경치만큼 추워 보이는 것은 없지 않을까?-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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